배상연
裵相淵1917. 11. 16 ~ 1981. 4.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결심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결심대의 대왕산죽창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7년 11월 16일 경상북도 경산군(慶山郡) 남산면(南山面) 사월리(沙月里)에서 배진헌(裵鎭憲)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항일 활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식 성명 강요로 대성상연(大城相淵)으로 고쳤다. 1944년 6월부터 경산 지역에서도 강제 동원을 위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같은 마을 출신 박재달(朴在達) 등이 징병·징용을 위해 청년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에 박재달 등과 함께 7월 5일과 7월 8일, 그리고 7월 15일 등 모두 3차례에 걸친 회합을 통해 거사를 논의하였다. 7월 15일 사월리 원당보에서 열린 3차 회합에서 최종적으로 29명의 대원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1944년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山陽)·송내(山陽)·남곡리(藍谷里)에서 모인 26명의 청년들과 함께 대왕산으로 올라갔다. 박재달·박재천(朴在千)·김인봉(金仁鳳) 등 3인은 마을에 남아 정보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오른 26명의 청년들과 함께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여 편제를 정하였다. 대장 안창율(安昌律), 부대장 김명돌(金明乭) 아래에서 2소대 소대장을 맡았다. 7월 27일부터 시작된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제 경찰들의 회유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8월 1일부터 2차례에 걸친 일제 경찰의 공격에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그리고 용산(龍山)으로 이동한 뒤 8월 5일부터 다시 시작된 일제 경찰의 공격에 돌을 던지며 항거하였다. 이 과정에서 결심대는 남산면주재소 공격과 주재소 주임 살해, 식량 공급 및 진지 이동 등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지만, 식량공급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대원들과 함께 8월 9일 하산하였다. 모든 대원들이 8월 13일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결심대의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이른바 보안법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14일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겪다가, 1945년 4월 박재달 등과 함께 병으로 보석되었다. 광복을 맞이하여 8월 17일 소송이 취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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