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관
朴進寬1860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3)
관련 사건
- · 장진군 신남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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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3) 함경남도 장진군(長津郡) 신남면(新南面) 중흥리(中興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60세이므로 1860년생으로 추정된다. 향리에 거주하며 1919년 3월 14일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古土里)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고토리 만세운동은 전국적인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 들은 중흥리와 고토리 등 신남면의 6개 마을 주민들이 한영태(韓永泰)·한면각(韓冕珏)·윤복민(尹福民) 등을 중심으로 한 사전 계획에 따라 고토리 수산물 장터에 모여 시작되었다. 거사일인 3월 14일 오후 4시경 200여 명의 농민이 장터에 모인 가운데, 한영태 등 3인의 독립선언을 시작으로 시위 군중은 미리 제작해둔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때 적극적으로 만세를 외치며 장터 사람들의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고토리 헌병주재소장 시마모토 신하치(島本新八)를 비롯한 일본군 헌병들이 해산을 강요하며, 이에 불복하는 노석규(魯錫奎) 등을 주재소 내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 이에 시위 군중과 함께 주재소에 돌을 던지고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헌병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하여 한규문(韓奎文) 등 2명 이상의 농민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시위는 더욱 격렬해져 한영태의 인솔 하에 주재소 건물로 들어가 내부 물건을 부숴 밖으로 내던지고 서류를 불태웠다. 이때 주재소 안에서 한계연(韓啓淵) 등과 함께 일제 헌병들을 구타하였다. 이후 15일 오전까지 시위가 계속되자 인근 헌병주재소에 주둔하던 일제 헌병들이 몰려와 총칼을 휘두르며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일제 헌병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한영태 등과 함께 “한민족으로서의 정당한 의사 표현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취지로 항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8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취소되고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고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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