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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주

朴政柱

1871. 1. 29 ~ 1921. 10.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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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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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長水)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장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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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1년 1월 29일 전라북도 장수군(長水郡) 장수면(長水面) 대성리(大成里)에서 태어났다. 이명(異名)은 박화용(朴和容)이다. 어려서 유학(儒學)을 공부하였고, 1919년 당시 고향 마을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19년 3월 초순 이후 서울과 전주(全州)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산서면(山西面) 동화리(桐花里) 장날을 기회로 삼아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시장으로 갔다. 오후 3시경 미리 준비한 태극기 2개를 장대에 매달아 앞세우고 시장 중앙으로 나가 정호현(丁豪鉉)와 정봉수(丁奉洙)에게 전달하여 받들게 하였다. 이들과 함께 선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날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를 연호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 행진을 벌이던 도중 정호현·정봉수와 함께 일제 헌병에 붙잡혀 동화 헌병주재소로 끌려갔다. 이에 흥분한 김형택(金炯澤) 등 약 200명의 군중들이 헌병주재소로 몰려와 석방을 요구하였다. 기세에 압도당한 일제 헌병이 정호현·정봉수와 함께 석방하였다. 다시 시위 군중을 이끌고 산서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것은 산서면으로나 조선인으로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매우 유쾌하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고 해산하였다. 이후 이날 만세운동의 주도자로 붙잡혀 모진 조사를 받았다. 1919년 5월 2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7월 26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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