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조
朴正朝1880. 2. 7 ~ 1943. 2.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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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4) 1880년 2월 7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대박리(大朴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정조(朴正祖)를 사용하였다. 1919년 4월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정산시장(定山市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5일 정산시장에 갔다가 일제 헌병이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강압적으로 끌고가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여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은 오후 3시경부터 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 등의 주도 하에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장에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며 시작되었다. 그러자 일제는 헌병들을 출동시켜 해산을 명령하고 함께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강제로 끌고갔다. 잡혀 간 만세시위 주도자들을 대신하여 정산향교(定山鄕校) 직원인 권흥규(權興圭)가 시위대를 이끌었다. 7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갔다. 끌려간 주도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던 중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그 자리에서 사망하자, 시위대는 황망함 속에 해산하였다. 4월 6일 아침, 정산시장 사람들과 함께 헌병주재소로 갔고,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고인의 자택이 있는 목면(木面) 안심리(安心里)로 향하는 운구에 참여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선두에 세운 운구 행렬이 지나는 길목마다 많은 주민들이 합류하여 1,00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운구 행렬이 지곡리(池谷里)를 지날 즈음 ‘조선독립만세’가 연창되면서 운구 행렬과 시위대를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만세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공주(公州)의 헌병을 지원 병력으로 급파하였다. 도착한 헌병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하며 이동하는 운구 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로 발포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권흥규의 조카딸과 명정을 쓴 권영진(權寧鎭) 등 6인이 다시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면서 시위대는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 일제 헌병의 만세시위 참여자에 대한 조사와 검거 과정에서 붙잡혔다. 모진 조사 과정을 통해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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