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일
朴雨日1879 ~ 1910. 1.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민종식 의병부대(홍주의병)
- · 박도경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5)
관련 사건
- · 민종식 의병부대(홍주의병)
- · 박도경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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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5) 충청남도 당진군(唐津郡) 군내면(郡內面) 하중두리(下中頭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9년 당시 31세로, 187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박우일(朴禹日)이라는 이명이 있다. 농업에 종사하다가, 1906년부터 의병부대에 들어가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05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전개되었다. 충남에서는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이 을사의병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다. 1906년 5월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무렵 홍주의병의 규모는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좌익장으로 활동하면서 서천(舒川)과 남포(藍浦, 현 보령)에서 많은 총포와 탄약을 접수하였다. 서천과 남포의 친일 군수를 붙잡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격퇴시켰다. 5월 19일 홍주(洪州, 현 홍성)로 진격하여 홍주성을 장악하고, 의병부대를 재배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며 홍주성을 방어하였다. 5월 20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졌으며 이 때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5월 31일 새벽 3시 경 일본군이 군사를 보강하여 기습 공격해 오자 급히 대응하였지만, 채광묵(蔡光默)·성재평(成載平) 등 수백 명이 전사하고 83명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 더 이상 홍주성을 지킬 수 없게 되자 다른 의병장들과 함께 후일을 기약하고 탈출하였다. 이후 청양(淸揚)·온양(溫陽)·석암사(石岩寺)·공주(公州) 등에서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1906년 9월 민종식 의병장과 함께 한곡(閑谷)의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모여 10월 5일 예산으로 진격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그 지역에 사는 일진회원(一進會員)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1907년 2월 내소사(來蘇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은거 생활을 하였다. 전남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있었던 전해산(全海山)을 만나서 앞으로 활동을 계획하였다. 1907년 7월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통감정치를 강화하고 한국 식민지화 작업을 본격화 하였다. 8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여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는 등 의병전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909년 2월 1일 박도경 의병부대에 들어가 전남 함평(咸平)·영광(靈光)·무장(茂長, 현 고창)·고창(高敞)·흥덕(興德, 현 고창) 등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9년 2월 10일 의병 5명과 함께 영광군 신광면(新光面)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2월 하순에는 의병 3명과 함께 함평군 홍동리(紅洞里)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 후 줄포(茁浦)에서 박도경 의병장으로부터 일본 기병과 헌병, 순사 등의 경비 상황과 일본인 숫자, 지리 등을 정탐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지시에 따라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09년 6월 17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종신징역을 받았다. 이후 옥고를 치르다가, 1910년 1월 3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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