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동
朴順東1920. 5. 2 ~ 1969. 10.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OSS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9)
관련 사건
- · OSS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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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9) 1920년 5월 2일 전라남도 순천군(順天郡) 순천면(順天面) 행리(幸里)에서 박재화(朴再和)와 김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호는 율관律(觀)이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식 성명 강요로 박전순동(朴田順東)이라는 창씨명을 쓰기도 하였다. 1928년부터 1933년까지 순천남소학교를 다녔다. 소학교를 졸업한 1934년부터 2년 동안 전라남도 승주군(昇州郡, 현 순천시 승주읍) 선암사(仙巖寺)에서 시조 시인이자 선암사 부주지였던 철운(鐵雲) 조종현(趙宗玄, 본명 용제(龍濟))에게 승려 수업을 받았다. 선암사의 후원으로 1936년 4월 서울 중동중학교(中東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일본인 교사의 일기 검사를 사생활 침해이자 인권유린이라고 항의했다가 일제 경찰에 불려가 호된 문책을 당하기도 하였다. 1941년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다시 선암사에서 2년간 불교 수업을 받다가 1943년 불교계의 권유로 일본의 불교계 대학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이른바 학도지원병으로 1944년 1월 20일 동원되었다. 용산 제62부대에 배치되어 6개월간 훈련을 마치고 버마(현 미얀마)의 전장으로 끌려갔다. 1944년 9월 7일 도착한 버마에서 일본 버마 원정군 오오가미(狼)사단 소속 아야노(綾野) 산포(山砲)중대에 배치되었다. 이 부대에는 니혼대학(日本大學)의 이종실李(鍾實)과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이가형李(佳炯) 등 2명의 학병이 있었다. 1945년 3월, 일본군이 임팔작전에서 패배하였고, 영국군 탱크부대가 버마의 일본군 퇴로를 끊으려 한다는 전황 소식을 듣게 되었다. 3일 후면 영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에 병약한 데다 말라리아까지 걸려있던 이가형을 제외하고 이종실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여 버마 쿠메(Kume)의 영국군에 투항하기로 결심하였다. 1945년 3월 23일 수통 2개, 쌀 두 줌, 38식 소총 1정, 실탄 30발을 들고 부대 근처 마을에 살던 인도인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결행하였다. 그는 인도 뭄바이(Mumbai)에서 대학을 마치고 양곤(Yangon)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양곤 침공을 피해 쿠메로 이동해온 인물로, 강제로 끌려온 두 사람의 학도병에게 동정하여 도움을 준 것이다. 사흘 밤낮을 걸어 3월 26일 인도인의 장인이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무사히 영국군에 투항할 수 있었다. 소개장에는 이 둘은 일본군에게 강제 동원된 조선의 학생으로 연합군에 적의가 없으며 투항하려 한다고 쓰여 있었다. 영국군 사단사령부에서 간단한 심문을 받고 같은 해 3월 28일 인도 뉴델리(New Delhi)로 향하였다. 뉴델리의 중국·버마·인도전구(China Burma India Theater) 총사령부에서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지냈다. 1주일 후 일본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출신으로 충청남도 금산군(錦山郡) 세무서 근무 중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한 박형무(朴亨武)가 합류하였다. 뉴델리에서 영국군의 포로로 포로번호(#M-1354)를 부여받고 생활하면서, 일본군의 궁성요배를 거부하고 반일적인 감정을 서슴없이 토로하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뉴델리 주재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주목을 받아, OSS 인도-버마지대 소속 최창수(Stanley Choy) 하사의 통역으로 탈출 과정·출신 지역·항일 의지 등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이 무렵 OSS는 한반도 침투작전인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OSS 인도지대는 항일의 의지를 적극 표명한 세 명의 학병 탈출자를 워싱턴 본부로 보냈다. 5월 24일 워싱턴에 도착한 뒤, 29일 로스앤젤레스 산타 카탈리나(Santa Catalina)섬의 훈련장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재미한인 이태모李(泰模)와 한 조에 편성되어 지도 해독·폭격 및 사격·선전·암살·정보 수집·지뢰 설치·무선조작법 등 특수훈련과 실제 침투훈련까지 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일제의 패망으로 프로젝트는 종결되었다. 그러자 OSS와 미군부는 이들을 하와이의 포로수용소로 보냈다. 제네바협약을 무시하고 한인 포로들을 전쟁에 동원했다는 비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셋은 포로수용소 당국과 교섭하여 2,700여 명에 달하는 한인 포로들의 별도 관리를 요청하고 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한인 포로의 이해를 대변하는 주간지 『자유한인보(Korean Free Press)』를 창간하여 1945년 12월 12일자 제7호까지 발간하였다. 1945년 12월 21일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1946년 1월 11일 인천항으로 귀국하여, 순천 주둔 미군정청의 통역관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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