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승수
文升洙1905. 1. 23 ~ 1950. 7.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성진회
- · 전남운동협의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5년 1월 23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군외면(郡外面) 대야리(大也里)에서 문양준(文良俊)과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 태어났다. 3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조부인 백수(白受) 문학서(文學瑞) 밑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호(號)는 백산(白山)이다. 1926년 11월 광주농업학교(光州農業學校, 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재학 중에 광주고등보통학교(光州高等普通學校)(약칭 광주고보) 학생인 왕재일(王在一)·장재성(張載性), 광주농업학교 박인생(朴仁生) 등과 함께 항일 학생운동 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성진회는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결합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으로 사회과학 연구를 위해 회합하였으나, 궁극적으로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7년 3월 성진회는 기밀 누설을 염려하여 형식상 해산하였으나, 광주농업학교 재학생들과 함께 독서 모임을 계속 이어갔다. 같은 해 10월 김복만(金福萬)·김재룡(金在龍)·유상걸(柳上杰)·주당석(朱唐錫)·유치오(兪致五)·정동수(鄭東秀) 등과 함께 광주 시내 누문리(樓門里) 김태호(金台鎬)의 집에 모여 성진회의 목적 달성과 이를 추진할 계획 등을 논의하였다. 졸업을 앞둔 1928년 2월에도 성진회 회원들과 회동하여 졸업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각자 노력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8년 광주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고향인 완도의 사립 약산(藥山)보통학교 교사로 복무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민족교육에 힘썼다. 또한 비밀결사 단체인 약진회(躍進會)를 결성하여 사회과학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29년 11월에 있었던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풀려난 뒤에도 완도군에서 황동윤(黃東允)·이기홍(李基弘)·최규창(崔圭昌) 등과 비밀결사에 가입하고, 교양 책임을 맡아 야학교사 등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완도지역 농민운동의 지도기관 결성을 위해 동료를 모으는 등, 사회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농민들의 소작료 문제나 지역 건설 현장에서의 임금 문제 등 주로 지역민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문제들에 적극 관여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가 결성되자, 그 산하 조직으로 완도군 농민조합건설위원회(農民組合建設委員會)를 조직하고 재정책임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1933년 5월 해남(海南)의 김홍배(金洪培)와 완도의 황동윤 등이 중심이 되어 해남군 성도암(成道庵)에서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이 단체는 전남지역의 농민·어민·노동자·지식인을 망라하여,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적 지도기관 결성을 목표로 사무부·조직부·조사부·구원부의 부서를 갖추었다. 완도지역을 중심으로 소작쟁의를 지도하거나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조직을 확장하였다. 1934년 2월 전남운동협의회 동지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전남 9개 군에 걸쳐 500여 명이 붙잡혔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다시 수감되어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홍동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