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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태

朴龍泰

1888. 2. 14 ~ 1938.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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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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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은율(殷栗)중국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은율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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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불변단
  • · 천진한교동지회
  • · 대한독립당주비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05)

관련 사건

  • · 불변단
  • · 천진한교동지회
  • · 대한독립당주비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5) 1888년 2월 14일 황해도 은율군(殷栗郡) 북면(北面) 동곡리(桐谷里)에서 태어났다. 한학과 역사학, 대종교(大倧敎) 교리에 폭넓은 소양을 지녔다. 이명으로 박해관(朴慧觀)·박검산(朴劒山), (撲險山)·박일산(朴釰山)·박용태(朴容泰)를 사용하였다. 1917년 8월 중국 톈진(天津)으로 이동하였다. 남개학교(南開學校) 교장 장보링(張伯苓)과 교유하며 한인 유학생 기숙사 사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남만주 잉커우(營口)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2월 톈진으로 이동하여 프랑스 조계에 거주하며 의업에 종사하였다. 3월 『대한민보(大韓民報)』를 발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방침에 따라 『대한민보』는 1920년 2월 17일까지 발행되었다. 1919년 4월 18일 톈진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불변단(不變團)을 결성하였다. 불변단에서는 기관지 『한민주보(韓民週報)』를 발간하였고, 한국적십자회 톈진지부를 운영하였다. 불변단의 조직 자금을 마련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기에 설립 후 재정을 책임지는 서무를 담당하였다. 불변단에서 내무와 연락 임무를 담당하였다. 1920년에는 단장과 부단장 등 주요 간부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국내 각지로 파견되면서부터는 실질적인 불변단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가을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톈진으로 이동하여 연락기관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12월 상하이에서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만나 톈진에 교육기관과 선전부 설치를 건의하였다. 1920년 2월 초 임시정부 「내무부 공함(公函) 제26호」를 받았다. 공함은 3·1만세운동 기념 축하식을 가능한 “성대하게” 거행하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3월 1일 톈진 프랑스 조계지(租界地) 자택에서 한국독립선언 제1회 기념축하회를 개최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상하이에서 발간된 『신한청년(新韓靑年)』 창간호에 「『신한청년』 창간을 축하하며」라는 제목으로 축사를 게재하였다. 3월 초순 상하이로 가서 『신한청년』을 가지고 톈진으로 돌아왔다. 4월 3~5일 개최될 중국 전국기독교청년회 25주년 대회에서 『신한청년』을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1920년 8월 29일자로 「한국 망국 기념 제11회 경고문-중외 인사에게 피로써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작성,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10월 남개학교 재학생 신명화(申命和) 외 12명과 함께 학생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12월 28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신채호(申采浩)가 신문 『신광(晨光)』을 발간하였다. 1921년 1월 『신광』 톈진분사(天津分社)를 설립하고 『신광』 제1호를 전달받아 배포하였다. 이와 함께 남개학교 학생회를 기반으로 민단을 조직하기 위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오인석(吳仁錫) 등과 협의하였고, 1921년 2월 10일 톈진 프랑스 조계지에서 민단 조직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기로 계획하였다. 1921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약 400매를 인쇄하여 오전 11시부터 톈진 외국 조계에서 배포하였다. 당일 오후 톈진 프랑스 조계에서 3·1절 기념축하회가 개최되었다. 축하회에 참석하여 “3월 1일을 축하”하자고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하거나 투옥된 이들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는 그다지 힘든 상황이 아니다. 우리의 언행을 일제 관헌이 듣는 것은 매우 유감이며 주의”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소감을 발표하였다. 1921년 3월 26일 일제 밀정이 공작하여 톈진 남시(南市) 화원(華園)에서 범죄은닉과 사기로 중국 경찰에게 붙잡혀 톈진일본총영사관에 넘겨졌다. 톈진 재주 한인들이 요청하여 프랑스 영사가 일본 영사에게 석방을 요청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톈진 중국 신문 『신민의보(新民意報)』 등은 일제를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1921년 4월 19일 톈진일본총영사관 재판에서 범인은닉으로 징역 3월, 국제보안취체률 위반으로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범인은닉에 대해 나가사키공소원(長崎控訴院)에 항소하였으나 일제와 형기 협상을 통해 항소를 취하하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5월 1일 톈진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중국 재류 금지 3년 처분을 받았다. 평안북도 의주(義州)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후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 징역 3년을 받고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하였다. 1921년 6월 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어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7월 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4년 4월 26일 만기로 풀려나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사리원면(沙里院面) 북리(北里)로 이동하여 거주하였다. 1924년 말부터 1927년까지 대종교진흥회(大倧敎振興會)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톈진으로 이동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하숙업에 종사하였다. 1929년 7월 톈진 프랑스 조계에서 톈진 한교동지회(韓僑同志會)를 조직하였다. 1930년 3월 말 톈진에서 안창호·이석산(李石山)·김인경(金仁慶) 등과 만나 독립운동진영 전선 통일과 운동 방침, 독립운동 해외 후원을 위한 신문 발행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장보링과 협의하면서 대한독립당주비회(大韓獨立黨籌備會)를 결성하였다. 1930년 6월 15일 주간으로서 대한독립당주비회 기관지 『조선지혈(朝鮮之血)』을 창간하고 1,500부를 인쇄하여 톈진과 상하이, 만주, 한반도에 발송하였다. 또한, 중국 잡지사 신동방사(新東方社)를 통해 700부 정도를 해외에 배포하기로 하였다. 1932년 10월 말 톈진에서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북중국 파견원 정순갑(鄭淳甲)과 만나 향후 활동을 논의하였다. 1933년 11월 톈진에서 최석순(崔錫淳)과 만나 남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혁명군 양세봉(梁世奉)과 연대하여 일제 기관을 공격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일제 고위관료와 친일 행위자를 처단한다는 계획을 논의하였다. 1937년 7월 톈진에서 김구(金九)와 연락하며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구가 톈진에 파견한 안경근(安敬根)·이원일(李元一) 등과 함께 일제 군사 활동을 조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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