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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호

朴在鎬

1899 ~ 1932.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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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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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홍원(洪原)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홍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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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홍원청년동맹
  • · 홍원기자대회
  • · 홍원농민조합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홍원청년동맹
  • · 홍원기자대회
  • · 홍원농민조합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주익면(州翼面) 신정리(新井里) 출신이다. 기록에 따르면 189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청소년기에 홍원군 내 육영학교(育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와 동시에 홍원청년회(洪原靑年會) 등의 청년단체에 속하여 당면 사회문제를 논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데 앞장섰다. 연사(演士)로서의 재능을 발휘하여 1925년에는 육영학교 내 강연 대회에서 입상하고, 이를 계기로 동아일보 주최 전조선현상학생웅변대회(全朝鮮懸賞學生雄辯大會)에 함남 대표로 출장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6년에는 기자로 활동하며 홍원군 및 함남 전체에 걸친 지역 현안을 취급하였다. 1926년부터 홍원지역 내 청년 단체와 기자단의 임원으로서 사회문제와 민족문제에 깊이 관여하였다. 같은 해에 홍원청년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농민의 계급적 이익과 교육계몽을 추구하는 홍원농민간친회(洪原農民懇親會)의 발기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홍원기자단 집행위원회의 서무부(庶務部) 임원으로 선출되어 부패한 일제 경찰들이 한국인을 상대로 자행한 포악한 행위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사회주의단체 좌진회(左進會)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홍원군 내의 사회주의운동 진흥과 단체 간의 연합을 주도하였다. 동시에 신간회(新幹會) 홍원지회의 상무간사, 홍원청년동맹 재정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말에는 농민과 노동자 문제를 중심으로 함남 주민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한편, 일제 자본에 대응하는 한국인들의 생존권 투쟁을 지원하였다. 1927년 11월 7일에는 홍원노동조합의 러시아 혁명 10주년 기념 연사로 참석하였으며, 정염수(鄭濂守) 등 홍원청년동맹원들과 뜻을 같이하여 홍원농민조합(洪原農民組合)을 창설하기로 결의하였다. 12월 11일 홍원농민조합 발기 당시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어 지주-소작인 문제, 전북 옥구(沃溝)에서 일어난 소작쟁의 문제, 장진강수전회사(長津江水電會社)의 농토 강제매수 문제 등 당시의 사회·민족문제 대책을 논의하였다. 1927년 12월 26일과 27일 고원군(高原郡)에서 개최된 함남기자대회(咸南記者大會)는 장진강수전회사의 횡포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주선을 받은 일본인 이주민 문제, 재만동포 문제 등 각종 사회 현안과 민족문제를 주제로 하였다. 이때 홍원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하였는데, 조선총독부는 대회가 불온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하여 강압적으로 해산시켰다. 이에 12월 27일 밤 8시에 함남 지역 기자들과 함께 ‘고원경찰탄핵대회대강연회(高原警察彈劾大會大講演會)’라고 쓴 깃발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가두연설을 실시하였다. 고원군민들이 기자들에 호응하여 큰 시위로 발전하자 일제 경찰은 일대 주재소의 인원을 동원하여 시가지를 봉쇄한 후 총을 쏘며 군중을 해산시킨 다음 기자들을 검속(檢束)하였다. 이때 집회의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고원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동료 기자 15명과 함께 구속, 기소되어 예심(豫審) 재판을 받았다. 함남기자단연맹과 변호사 한창달(韓昌達)의 구명을 통해 예심이 끝난 뒤인 1928년 4월 4일 보석 출옥하였다. 이후 1928년 7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금고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다가 그 해 10월 19일 취하하여 1심 결과로 확정되었다. 3개월간의 옥고 동안 열악한 수감 환경과 일제의 가혹한 취조로 인해 건강을 해쳐 달독증(疸毒症)이 지병이 되었고, 직장도 잃게 되어 생활고에 시달렸다. 이후에도 사회단체 활동을 계속하여 1929년 3월에는 홍원농민조합 대표 자격으로 치안유지법 개정을 반대하다 암살당한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의 장례식을 주재하였다. 같은 해 8월 농민조합 정기대회에서 조직 발전 및 농촌부흥책에 대해 논하였으며, 조직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5월 27일 홍원농민조합은 일대 농민 2천여 명을 규합하여 농촌의 도탄상과 지주-소작인 격차를 성토하며 일제에 대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는 시위를 홍원군 내에서 전개하였다. 또한 정염수 등 농민조합 간부들은 고리대금업자 및 계가 가난한 농민들을 착취한다고 하여 8월 29일부터 9월 20일에 걸쳐 홍원군 내 고리대금업자와 계를 습격하여 채무관계서류를 빼앗아 불태웠다. 이에 일제는 홍원군 일대의 마을을 포위 수색하여 시위와 문서 소각에 참가한 농민들을 연행하였다. 농민조합이 청년동맹과 신간회 등 홍원군 내 단체와 관련이 있다고 하여 단체의 주도자로 지목되어 붙잡혀 투옥되었다. 일제의 가혹한 조사로 인해 지병이 악화되어 5개월 만인 1932년 1월 5일 병으로 보석되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5일 만인 1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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