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순
朴在淳1884. 10. 2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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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3) 1884년 10월 24일 함경북도 명천군(明川郡) 하가면(下加面) 용포리(龍浦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서당 교사로서, 3월 15일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명천군 하가면 만세운동은 3월 14일 면내에서 현용묵(玄龍黙)·김상훈(金相勳)·최우용(崔禹鎔)·김익련(金益鍊)이 회합하여, 다음 날인 3월 15일 화대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만세시위에 사용할 큰 깃발을 제작하였다. 1919년 3월 15일 만세시위 장소인 화대시장으로 갔다. 주도자 중 한 명인 현용묵은 전날 제작한 큰 깃발을 들고 상가면(上加面) 조당동(潮塘洞)에서 동네 주민들을 인솔해서 화대시장으로 왔다. 오전 9시를 전후하여 하가면의 포항동(浦項洞)·용포동·평촌동(坪村洞) 해안 지역 주민 300명이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화대시장에 도착하였다. 하가면 남산동(南山洞)을 비롯한 인근 지역의 주민 약 800여 명도 화대시장으로 와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전 11시 무렵 현용묵·박승룡(朴承龍)·최계락(崔啓洛)·최경남(崔鏡南) 등은 화대시장에 모인 2,0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였다. 오후 1시경 현용묵·허을(許鳦)·허영준(許英俊)·김성련(金成鍊)이 인솔하는 시위대와 함께 선두에서 하가면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현용묵이 면장 동필한(董弼漢)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지만, 면장은 분별없는 행동이라면서 만세시위를 비판하였다. 이에 분노한 현기율(玄機)律·박승룡·김익련·김재한(金在漢)이 면장을 때리자 화대 헌병분견소장을 비롯한 일본 헌병대가 출동해서 면장을 빼내서 분견소로 이동하고자 하였다. 이에 시위대와 함께 이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격렬하게 저항하는 한편으로 화대 헌병분견소로 몰려갔다. 분견소에 도착해서 시위대 일부는 막대를 휘둘렀으며, 또 다른 시위대는 분견소를 향해 돌을 던지면서 격렬히 항쟁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무차별 발포를 단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5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3월 15일 밤에 시위대와 함께 일본 헌병의 무차별 발포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면사무소와 면장 사택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화대시장 일대에 거주하는 일본인 20여 명은 분견소로 대피해서 자체 무장을 하기도 하였으며, 길주군(吉州郡)의 일본 헌병대와 기병대 등이 오후 10시 무렵에 화가면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일본 헌병·기병·경찰들은 시위대를 총칼로 강경하게 진압하는 한편 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그 과정에서 추가로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1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일본 군경의 무자비한 총탄은 피하였으나, 체포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붙잡혔다. 1919년 7월 9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10월에 벌금 30원 및 노역 기간 30일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서 항고하였으나, 같은 해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을 부분 파기하고 징역 8월을 받았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그 해 11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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