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작지
朴作之1897. 1. 20 ~ 1936. 9.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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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7) 1897년 1월 20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밀양면(密陽面) 내일동(內一洞, 현 밀양시 내일동)에서 태어났다. 자동차 수리공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거주지인 밀양면 내일동은 지역의 경제적·문화적 중심지인 밀양시장이 위치한 곳이고, 이곳을 중심으로 당시 밀양에서 세를 확장하고 있던 일본인들에 대한 적대감이 확산되었으므로 이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19년 밀양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밀양면 읍내시장 만세운동은 윤세주(尹世冑)와 윤치형(尹致衡)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고종의 장례 행렬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서 낭독식과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였다. 두 사람은 밀양의 사립학교였던 동화학교(同和學校)의 교장 전홍표(全鴻杓)와 논의하여 만세운동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거사일을 3월 13일로 결정하고, 정동찬(丁銅燦)·이장수(李章守)·김소지(金小池)·김병환(金餠煥) 등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고 선언서를 등사하는 등의 사전 준비를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오후 1시, 윤치형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함께 이장수와 김소지 등이 앞서 큰 태극기를 들고 나팔을 불며 읍내를 행진하였다. 이에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그 뒤를 따랐다. 만세시위 행렬이 밀양보통학교를 지날 때 대열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이후 시장을 행진할 때 엄청득(嚴淸得)·노재석(魯在石)·양쾌술(梁快述) 등과 함께 구경하는 사람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하였다. 이때 김상득(金相得)은 『조선독립신문』을 행인들에게 배부하였다. 이후 시위 군중은 밀양공립보통학교 사옥에 돌을 던지는 등 밀양 군민의 이권을 침탈하던 조선총독부와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시위대는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군 헌병들이 밀양경찰서 순사들과 합세하여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해산되었다. 일제 군경의 폭력적 진압 과정에서 시위 주도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밀양경찰서로 끌려갔다. 모진 조사를 거친 후 결국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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