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박세화

朴世和

1834 ~ 1910. 8. 2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세화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고원(高原)의병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고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34년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남흥리에서 박기숙(朴紀淑)과 단양 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는 연길年(吉)이며, 호는 의당(毅堂)·곤남산인(崑南山人)·묵암(黙菴)·도솔산인(道率山人)·의당노인(毅堂老人)·불억산인(茀億山人)·불억산노우(茀億山老友)·해좌췌생(海左贅生)·해동(海東)·유민(遺民)·황명유민(皇明遺民)·희현재주인(希賢齋主人) 등을 사용하였다. 양반 가문에서 부친의 가르침을 받으며 독학하다가, 20대 초반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의 제자인 사현(思峴) 이지용李(之容)을 만나 10년간 성리학을 배웠다. 30대까지는 고향에서 학문적 수련에 몰두하며 명성을 얻었고, 40세 이후 고향을 떠나 안변(安邊)의 용동龍(洞), 회양(淮陽)의 천동(泉洞), 양구(陽口)의 해안(海安, 양구군 해안) 등을 2~3년 간격으로 옮기면서 제자를 기르고 향음례를 행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겪고 태백산 자락의 활목이 마을(현 태백시 황지동)에 은거하며, 강학과 습례(習禮)를 꾸준히 행하였다. 이후 충주의 석오(石塢), 제천의 의호(義湖, 의림지), 영월의 선암(仙巖, 영월 한반도면 옹정리), 청풍의 두산(斗山, 제천 청풍면 부산리)으로 강학의 근거지를 옮겼다. 청풍에 머물 무렵 제천의 장담에 머물던 화서학파의 유중교(柳重敎)와 교유하였다. 이를 통해 의당학파가 화서학파와 함께 호서지역 척사운동의 중요한 주역이 되는 중요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후 강학 장소를 병산(屛山, 현 제천 청풍면 장선리)으로 옮겨다. 이때 윤응선(尹膺善)과 여러 제자들이 큰 스승으로 받들게 되면서 ‘의당학파’라고 할 만한 규모로 성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진리와 함께 죽을 사람[(與道俱亡人)]’이라고 써서 제자들에게 주고 불억산(茀億山, 제천 덕산면 월악리 불억이 마을 뒷산을 가리키는 듯함)으로 들어갔으나, 의병이 크게 일어나 단발령이 늦춰지자 병산으로 돌아왔다. 유인석이 이끄는 의병이 ‘복수보형復(讐保形)’을 내걸고 나서자 문인을 보내 격려하였다. 유인석 의병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불억산으로 들어갔고, 용하정사(用夏精舍)에서 대규모 강회를 열고 『계산문대(溪山問對)』를 저술하였다. 1904년 가을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에서 강론하였다. 열흘 넘게 걸리는 행차에 법복(法服)을 차려입은 선비들을 100명 가까이 이끌고 행진하였다. 강의는 만동묘 비문 한 구절을 외우는 것뿐이었지만,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강의를 전후하여 척사론자들의 염원이 담긴 화양동 일대의 유적을 돌아보았다. 이 무렵 호서지역에서 척사론(斥邪論)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되었다. 한편, 망명했다가 돌아와 재기를 꿈꾸던 유인석으로부터 황해도에 모여 의병활동을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따르지는 않았다. 이듬해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나라와 도(道)가 함께 망하는’ 상황으로 인식하고, 가을에 독자적으로 의병 봉기에 나섰다. 하지만 병으로 중도에 그쳤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경북 문경으로 잡혀간 뒤 대구를 거쳐 서울로 끌려가 이듬해 봄까지 고초를 겪었다. 1907년 여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예천 건학(乾鶴, 문경군 동로면 명전리 건학)으로 들어갔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서간도로 옮겨가 죽는 날까지 도를 지키는 일이었다. 이때 윤응선이 먼저 충주 서쪽 백운산(음성군 삼성면 서쪽에 있는 산) 아래로 거처를 옮기자, 이후 음성의 만생산 창동(昌洞, 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웃창골)으로 옮겼다. 그리고 윤응선과 박해준(朴海俊)을 시켜 서간도(西間島)로 옮길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중국의 치안이 혼란해짐에 따라 중지하였다. 1910년 9월 초 이른바 ‘합병’ 소식을 접하고, ‘도(道)가 끊어지고 나라가 망하였음’을 알고 순도(殉道)하기로 결심하였다. 제자들의 만류에도 곡기를 끊은 지 2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목숨을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강학을 그치지 않았다. 사후에 제자들이 용하정사에 영정을 모시자, 용하정사는 용하영당(用夏影堂)이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영당은 병산으로 옮겨져 ‘병산영당(屛山影堂)’이 되었다. 문집인 『의당집(毅堂集)』이 전한다. 1964년 봉안한 충용사(忠)龍(祠)가 충청북도 음성에 건립되었다. 지금은 장선리로 이전한 병산영당과 음성 충용사에서 춘추로 제향이 행해진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구완회⋮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