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朴貞薰186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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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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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천면(大千面) 남정리(楠亭里) 출신이다. 1920년 판결문에 52세로, 1869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직업은 잡화상이었으며, 1919년 3월 3일 수안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황해도 곡산군(谷山郡) 곡산면(谷山面) 남천리(南川里)의 천도교도 이경섭(李景燮)은 서울 천도교 중앙총부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로부터 각 지역의 천도교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지시받았다. 3월 1일 저녁 이경섭은 수안군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에서 수안군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安鳳河)와 김영만(金永滿)·나찬홍(羅燦洪)·최용식(崔鎔植)·이영철(李永喆)·홍석정(洪錫楨)·한청일(韓淸一) 등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이경섭은 수안군 천도교구 인사들에게 독립선언서 70장을 건네주었다. 3월 2일 수안군 천도교 교구장 안봉하는 천도교구실에서 김영만·나찬홍·최용식·김형선(金炯宣)·이달하(李達河)·나용일(羅容日)·장성도(張聖道)·홍두옥(洪斗玉)·안창식(安昌湜)·홍길재(洪吉載)·이윤식(李潤植)·홍두익(洪斗益)·이영철·이응호(李應浩)·홍석정·한청일 등과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3월 3일 천도교인들을 규합해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과 수안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사전에 모임을 탐지한 수안헌병분대가 교구실에 모인 인사들을 끌고갔다. 헌병대를 피한 이영철·홍석정·한청일은 천도교인들에게 3월 3일 독립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3월 2일 밤 대천면 남정리로 찾아온 김영선(金永善)으로부터 이튿날 아침 수안읍내 교구실로 모이라는 전갈을 받았다. 3월 3일 수안 천도교구가 위치한 수안읍내로 들어갔다. 수안 천도교구는 3월 3일 오전 6시부터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영철과 태극 모양의 깃발을 든 한청일·홍석정의 주도 아래 130~140명의 천도교도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 앞에 당도하였다. 그 자리에서 시위대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오전 11시경 수안 천도교구에서 이동욱(李東郁)과 오관옥(吳觀玉)이 조선 독립과 헌병분대 퇴거를 외치자, 이에 동조해서 시위대와 함께 함성을 외치면서 헌병분대 앞으로 나아갔다. 헌병분대 정문 앞에서 새끼줄을 치고 그곳을 넘어 오지 말라는 일제 헌병들을 밀치고 시위대와 함께 사무실로 진입을 시도하였다.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서 발포하였다. 발포 소식을 들은 홍석정·한청일·오관옥은 15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헌병분대로 갔다. 그들이 조선 독립과 헌병분대 퇴거를 요구하면서 헌병분대로 진입을 시도하자, 다시 시위대에게 발포하였다. 일제 헌병의 발포로 홍석정과 한청일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오관옥 역시 총탄을 맞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숨을 잃었다. 일제 헌병분대는 야경단(夜警團)을 조직해서 수안군 일대를 통제하였다. 3월 4일 보병 소대 20여 명을 시작으로 11일에는 용산 주둔 1개 중대 100여 명이 수안군에 파견되었다. 수안군 내에 일본군 병력이 도착하면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붙잡혔다. 일제 군경의 모진 조사를 거친 후, 이른바 치안 방해와 소요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일제가 수안군 시위 참여자에게 내란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지만, 고등법원에서는 최종적으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수안군 시위자에 대한 판결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1년여 늦게 진행되었다. 1920년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 방해는 무죄를 받았지만, 소요로 징역 1년 3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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