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욱
朴寅郁1896. 2. 2 ~ 1934. 6. 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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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5) 1896년 2월 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리(雙溪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명으로 박주욱(朴宙郁)을 사용하였다. 1919년 비안면 쌍계리에서 장로교회 목사 박영화(朴永和)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6~7일경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보고 온 김원휘(金原輝)는 박영화와 박영달(朴永達)를 만나 서울과 평양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시위 경과를 전하였다. 그 자리에 모인 인사들은 비안면에서도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거사 계획을 전해 듣고 시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2일 박영화·박영달·박영신(朴永新)·배중엽(裵重曄)·배달근(裵達根) 등과 함께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이날 정오를 기해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2일 오전 때마침 비안공립보통학교 전교생 150명은 학교 뒷산에 올라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만세운동에 가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쌍계동 박영신의 집 앞 도로에는 학생과 마을 주민 2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약속한 시각이 되자 김명출(金明出)·배도근(裵道根) 등 동지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여 만세시위의 시작을 알렸다. 주도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렬의 선두에서 온 동네를 행진하는 시위를 주도해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자진 해산해 평화적으로 만세운동을 마무리하였다. 오후 4시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는 조선인 경부와 순사 부장을 급히 파견하여 비안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도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였다. 이때 붙잡혀 모진 조사를 받고 결국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이 유지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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