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식
朴龍植1902. 1. 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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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족장(200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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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8) 1902년 1월 2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 중평동(中坪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시장(鞭巷市場)에서 펼쳐진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동군 임동면 편항시장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임북면(臨北面) 계곡동(桂谷洞)에 사는 유연성(柳淵成)이었다. 그는 만세운동을 함께 할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지금 만세운동을 펼치고 관청을 파괴하여 우리의 힘을 보여준다면 반드시 독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유연성의 이야기에 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유교희(柳敎熙) 등이 동참하면서 시위를 주도하게 되었다. 3월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한 주도자들은 임동면 지역을 나누어 각자 맡은 곳에서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중평동 일대는 박재식(朴載植)·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이 맡았는데, 이들의 제안에 적극 동조하고 참여를 결심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많은 마을 사람이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편항시장으로 가서,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는 시장 안에서 시위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오후 2시 무렵 유연성이 장터 중앙으로 나와 군중을 향해 연설하기 시작하였다. 유연성은 만세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 이야기한 후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선창에 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들의 만세소리에 장터에 있던 장꾼과 주민들도 합류하면서 시장은 만세운동의 열기로 가득하게 되었다. 이때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급파된 일본 경찰이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검거하려는 과정에서 저항하며 맞서는 배태근의 뺨을 때리며 끌고 가려고 하였다. 이를 보고 군중과 함께 분노하여 “저놈 죽여라”고 하며 일본 경찰에게 달려가 저지하였다. 분노한 군중을 본 일본 경찰은 그 자리에서 편항경찰관주재소로 달아났다. 이에 고무된 시위대와 함께 기세를 몰아 주재소로 향하였다. 유연성·배태근·박진선·조학이(趙學伊) 등 주도자들이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로 나아갈 때 선두에 있었다. 주재소 출입문 앞에 다다른 5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지만, 일본 경찰은 권총을 쏘며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시위대의 분노만을 샀을 뿐, 일본 경찰은 시위대 기세에 눌려 도망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돌과 몽둥이를 들고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가 주재소 벽과 창문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유리창·책상·의자 등의 기물을 부수고 장부와 서류 등도 모두 찢어서 파기하여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일본 경찰에게서 빼앗은 무기는 주재소 안에 있던 총탄 등의 무기들과 함께 모두 주재소 뜰 안에 있는 우물에 던져 버렸다. 일부 시위대는 경찰 숙소로 이동하여 침대·책상·의복 등을 모두 훼손하였다.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을 받은 주재소와 경찰 숙소는 기둥과 지붕만 겨우 남긴 채 폐허가 되었다. 주재소 시위가 끝난 후 일부 시위대는 해산하였지만, 1,500여 명의 군중은 면사무소로 가서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대는 다음날 새벽 3시까지 만세시위를 이어간 후에 모두 자진 해산하였다. 일본 경찰은 다음날부터 만세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이후 1919년 4월 17일 대구지검으로 이감되었고, 그 해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건조물 손괴, 가택침입,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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