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달
朴永達1887. 10. 30 ~ 1962. 11. 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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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7년 10월 30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쌍계동(雙溪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로 1919년 비안면 쌍계동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비안면 만세시위는 서울과 평양 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도와 대구 학생 만세운동을 계승하고자 한 학생들의 노력이 결합해 일어났다. 기독교도인 김원휘(金原輝)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1919년 3월 3일 평양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서울, 김천(金泉)을 거쳐 3월 6일에 의성으로 돌아왔다. 3월 6~7일 쌍계동 장로교회 목사인 박영화(朴永和)와 함께 김원휘로부터 만세운동 상황을 전달받았다. 김원휘는 앞으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될 것이고 이런 기회에 침묵으로 굴종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이에 동의하였다. 뒤이어 대구에서 학생집단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발발하였고, 비안면에도 영향을 끼쳤다. 대구 만세운동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돌아온 괴산동(槐山洞) 교회의 박우완(朴又完)과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인 박상동(朴尙東)이 독립선언서를 비안면에 전달하고 만세운동 조직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두 세력은 곧 의기투합하여 공동 행동을 결의하였다. 이후 주변 주민들과 접촉하여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였고, 박상동의 부친인 박영화(朴永和)와 그의 동생 박영신(朴永新), 그리고 배달근(裵達根) 등과 함께 3월 12일 새벽 박영신의 집에서 만나 태극기 200여 개를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날 정오를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하였다. 3월 12일 오전 비안공립보통학교 뒷산에서 만세운동을 거행한 뒤 합류한 학생들과 거사 소식을 듣고 모인 주민 등 200여 명이 오후 1시경 쌍계동 박영신의 집 앞 도로로 모였다. 동지들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는 것으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시위대의 앞에 서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온 동네를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행진 이후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하지만 오후 4시 만세시위에 관한 급보를 받은 의성경찰서에서 조선인 경부와 순사부장이 급파되어 비안주재소 경찰과 함께 시위 주도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였고, 이 가운데 18명을 기소하였다. 이때 붙잡혀 1919년 4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4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도리어 징역 1년으로 형량이 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7일 감형되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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