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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출

朴英出

1908. 3. 20 ~ 1938.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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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영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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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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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경성재건그룹
  • · 용산적색노동조합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경성재건그룹
  • · 용산적색노동조합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8년 3월 20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張面) 동부리(東部里,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박인표(朴仁杓)와 언양 김씨(彦陽金氏)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현출(炫出), 호는 정인(盯仁)이다. 본적지는 경남 동래군 동래면(東萊面) 칠산동(漆山洞)이다. 아버지 박인표는 기장군 제일의 대지주이자 기업가로서, 부산에서 고려상회를 경영하고 동래은행 창립을 주도하였다. 부산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를 통해 1915년에 결성된 비밀결사 대한광복회에 자금을 제공했다고 전해진다. 막내 숙부 박일형(朴日馨, 본명 박공표(朴孔杓))은 기장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동래청년동맹과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로 활동한 인물이다. 외숙부 김철수金(喆壽)는 1919년 도쿄(東京) 2.8독립선언의 대표위원으로 활동하다 징역 9월을 받고 출옥 후 양산청년회, 조선청년회연합회, 신간회 양산지회 등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1928년 동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 출신 김소애(金小愛)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인은 동래 최고의 부자인 김봉상(金鳳翔)이었다. 1920년 3월 기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1년 4월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5년 7월 부당한 교육 방침에 항거하여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으나, 학부형들의 중재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있던 1926년 2월 기숙사 사감인 마쓰다(松田)가 한국인 학생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일본인 교사 배척을 내걸고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 이과에 입학하였다. 이후 동래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고 방학을 이용하여 동래청년연맹과 함께 청년들을 계몽하기 위한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930년 3월 야마구치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 해 4월 교토(京都)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1930년 9월 7일 동래청년동맹 동래지부에서 주최한 국제청년일 기념 강연회에서 ‘청년과 종교’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같은 해 11월 동래청년동맹 간부들과 함께 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장소 대여를 거절한 범어사 포교소 측과 충돌이 있었다. 일제 경찰은 이를 빌미로 동래지역 사회운동을 탄압하려고 하였다. 결국 당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을 이끌던 한일철(韓一徹)·이영석(李永錫)·한무철(韓武徹) 등과 함께 1930년 11월 19일 동래경찰서에 붙잡혔고, 1931년 3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동안 점차 맑스주의 경제학을 신봉하게 되었다. 1933년 2월 일본공산당 기관지인 『적기(赤旗)』의 독자가 된 후 일본공산당 교토시위원회 자금부원인 세키 히데오(關秀雄)의 지도를 받으면서 교토제국대학 한인 그룹 조직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이로 인해 1933년 3월 일본 공산주의운동을 원조한 이유로 붙잡혔다. 그 해 5월 5일 교토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4년 3월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였다. 이후 서울에 체류하면서 비밀 지하운동에 참여하였는데, 1934년 5월 도쿄고등사범학교 출신 공산주의자 이관술(李觀述)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관술을 통해 공산당 재건운동을 하던 이재유(李載裕)와도 연결되었다. 이재유·이관술과 함께 지식인의 실천운동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효과적인 운동방침을 강구한 끝에, 1934년 11월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고 노동운동 부문을 맡았다. 이재유는 총책임을, 이관술은 학생부문 대중사업을 담당하였다. 11월 중·하순경 이재유와 함께 190개조에 달하는 ‘학교 내 활동기준’을 협의하고 결정하였다. 12월 10일경 노동자 투쟁방침을 확정지었다. 동지들과 함께 서울시내 각 학교에서 학생운동을 일으키고 영등포와 인천의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1935년 1월 11일 용산경찰서에 붙잡혔다. 이재유·이관술을 비롯한 조직원들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하여 며칠 동안 입을 열지 않고 일제의 모진 고문에 항거하였다. 1936년 7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7년 9월 11일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8년 8월 2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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