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천
金擎天1888. 6. 5 ~ 1942. 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흥무관학교
- · 창해청년단
- · 솔밭관 고려혁명군
- · 수청고려의병대
- · 고려혁명군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9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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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장(1998) 1888년 6월 5일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 서문외(西門外)에서 사족 출신인 아버지 김정우(金鼎禹)와 어머니 윤옥연(尹玉蓮) 사이에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본명은 광서(光瑞)이다. 다른 이름으로 김경천(金警天·金敬天)·김응천(金應天)·김현충(金顯忠)이 있으며, ‘조선의 나폴레옹’이라 불렸다. 아버지는 대한제국의 포병 장교였고, 형 성은(成殷)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대한제국 군대의 공병대를 만들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경기 광주군(廣州郡)으로 이주하였다. 아버지와 형은 곧 일본으로 유학하러 갔으므로, 홀로 어머니를 모시며 한문을 배웠다. 그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혼자 살았다. 1900년 여름 아버지와 형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형은 공병대 창설에 분주하고, 아버지는 육군 군기청장으로 근무함에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 경성학당(京城學堂)에 입학하여 일본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5세 때인 1903년 경성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을 시도하였지만,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한제국은 일본 유학생 파견자를 모집하였다. 최린(崔麟)·조용은(趙鏞殷, 조소앙)·김진용(金晉鏞) 등 50명의 유학생과 함께 1904년 8월 인천에서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어를 할 줄 알았으므로 다른 유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사이 정규 예비학교의 보통과를 이수하였다. 이때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군인이 될 결심을 하였으며, 육군 유년학교에 입학할 길을 찾아보았다. 1905년 9월 1일 일본 육군대신의 추천을 받고 일왕의 허락을 얻어 자격시험을 본 결과, 학력 수준이 예과 2학년에 해당한다 하여 도쿄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에 재학 중이던 1906년 겨울에 형이 사망함에 따라 6대 독자가 되었다. 연이어 1907년 봄 아버지까지 사망하는 불운을 겪었다. 1907년 9월 1일 본과에 입학하여 1908년 7월 졸업하였다. 이후 기병(騎兵) 상등병(上等兵) 자격으로 도쿄의 기병 제1연대 제1중대에 입대하였다. 1909년 10월 도쿄 근교에서 부대 대항 연습을 하고 있을 때,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아!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하고 속으로 외쳤다. 1909년 12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6월 졸업하였다. 그해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초대 총독으로 부임 예정이던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불러서 일본군 장교로 임관시키겠다고 약속하였다. 그해 12월 일본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대한제국의 유학생에서 일본군 장교로 처지가 바뀌었다. 1911년 8월 귀국해 혼인을 약속한 유정화(柳貞和)와 결혼하고 서울 사직동에 신혼집을 장만하여 할아버지, 누이 옥진(玉振)과 함께 거주하였다. 1913년 1월 가족을 데리고 도쿄로 이주하였다. 1915년 6월 11일 장녀 지리(智理)가 태어났다. 그해 9월 기병 소위에서 중위로 승진하였고, 그해 육군 도야마학교(戶山學校), 1917년 육군기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12월 육사 제26·27기생인 홍사익(洪思翊)·이응준(李應俊) 등과 제1사단에 근무하는 한국인 장교만의 친목단체인 전의회(全誼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1917년 2월 8일 둘째 지혜(智慧)가 태어났다. 1918년 6월 9일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 사직동 자택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해 12월 도쿄의 기병연대로 복귀하여 재직하였다. 이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적으로 개조의 흐름과 혁명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고 보았다. 때마침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도 통지받아 알고 있었다. 몸도 추스르고 정세도 판단할 겸 다시 기병연대에 휴가를 신청하였다. 1919년 2월 24일 서울로 돌아와 아내, 누이,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지내며 요양하였다.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 준비도 통지를 받아 항일적인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알고는 있었다. 화창한 3월 1일 오전 서울 시내에 있는 청년회관에 들려 윤치호(尹致昊)를 만났고, 이후 종로 일대에서 만세 시위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 이때 주변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권유받았다. 국외에서 여러 해 동안 공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서간도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1919년 6월 6일, 31세 되던 때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이 되는 일본 육사의 3년 후배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수원까지 내려가 밤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안둥(安東, 현재의 단둥)으로 갔다. 6월 9일 서간도를 향해 출발하여 약 보름 만에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의 대두자(大肚子)에 있는 신흥무관학교에 도착하였다. 대한제국의 무관학교 출신으로 며칠 먼저 와 있던 신팔균(申八均)을 만났다. 세 사람은 ‘천(天)’자가 붙은 호칭을 서로 붙여주기로 하고 신팔균은 동천(東天), 본명이 지석규(池錫奎)인 지청천은 청천(靑天), 그리고 자신은 경천이라 불렀다. 사람들은 세 사람을 가리켜 ‘남만주 3천’이라 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당시 200명 정도의 학생이 군사교육을 받고 있었다. 9월 중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결정에 따라 신팔균과 함께 무기를 구입하려고 러시아의 니콜스크를 향해 출발하여 가는 도중, 신팔균은 지린(吉林)에 남고, 몇몇 동지와 함께 창춘(長春)과 하얼빈을 거처 니콜스크에 도착하였다. 1920년 들어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며 이용(李鏞)·김하석(金河錫)·유동열(柳東說)·정재관(鄭在寬) 등 여러 독립운동가와 의견을 교환하며 한인 무장대를 편성하는 문제에 몰두하였다. 비록 “북도(北道), 남도(南道), 서도(西道), 서울…자기들끼리도 당파가 있다. 아아, 이것이 대한이 망한 이유가 아닌가”라며 실망하였지만, 자신은 어디까지나 중립이라며 “나는 생각한다. 군인은 군사행동의 실전지로 비바람을 무릅쓰고 가고, 삶과 죽음의 굴을 넘나들어도 좋으리라 한다”라며 각오를 다졌다. 실제 이후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어떤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며, 러시아 공산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우수리스크의 파르티잔스크(수찬, Suchan, 水淸)에서 일본군의 감시를 피하면서 한인 청년을 모아 부대를 만들고, 볼셰비키 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러시아인 민병대와 합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았던 마적을 소탕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920년 가을 외수청(外水淸) 일대에서 마적이 사라졌다. 1920년 9월 28일 무관학교를 세워 군사 교육을 실시하자는 북간도 독립운동 세력의 요청을 받고 출발하였다. 북간도에 가까이 갔을 즈음, 일본이 사주한 마적이 훈춘 영사관을 습격하고 이를 명분으로 일본군이 북간도를 침입하자 독립군이 모두 흩어졌다는 이른바 훈춘사건(琿春事件) 소식을 들었다. 자신이 머무는 곳 50리 밖까지 와 있던 일본군이 한인의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을 죽인다는 정보도 입수하였다. 10월 19일 발길을 돌려 수이푼(秋風, Suifun)의 솔밭관 고려혁명군 본부로 돌아갔다. 솔밭관 고려혁명군은 1920년 7월 15일 결성된 조직으로 일본군·러시아 백군·마적 등과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시베리아 일대에 이름을 알렸던 한인 빨치산 부대이다. 이때 인근에 있던 혈성단(血誠團)의 김규면(金圭冕)을 만나 그가 이끄는 창해청년단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수이푼 일대의 마적을 소탕하였다. 한편에서는 군정의 책임자로서 살인사건과 같은 형사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도 벌였다. 1921년 4월 24일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총사령관이 되었고, 5월 아누치노(都兵河, Anuchino)에 있던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군용품을 나누어 사용하면서 마적 소탕에 집중하였다. 9월 들어 적군과의 공동 작전을 강화하며 백군과 여러 곳에서 싸웠다. 이즈음부터 1922년 가을까지 러시아 적군과 일본군의 후원을 받은 러시아 백군 사이에 벌어진 시베리아 내전에서 적군의 편으로 참전하였다. 1921년 11월 자신을 후원하던 적군 대장이 백군과 내통하는 바람에 러시아 백군에게 다우비허를 빼앗겨 수청 고려의병대를 이끌고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1922년 1월 말 이만에 있던 군비단(軍備團) 군인 40~50명이 백군에게 살해당한 데 대한 반격으로 이만을 점령하였으나, 병력이 모자라 퇴각하였다. 1922년 5월 이념을 묻지 않고 일본군 및 백군과 싸우며 독립 역량을 키우고자 이중집(李仲執)을 총재로 하는 고려혁명군이 결성되었을 때 수청에 본부를 둔 고려혁명군 동부사령부의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1922년 6월 아누치노를 떠나 백군과 일본군의 허리를 끊고자 수이푼으로 이동하였지만, 한인의 일부 부대와 적군의 충돌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10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였다. 이에 적군 사령관이 한인 빨치산부대의 해산을 명령하자 자신의 부대를 해산시킴으로써 빨치산 지도자로서의 전투 지휘는 끝이 났다. 이즈음부터 적군 사령관에게 부탁받은 일본군의 군사학에 관한 서적을 번역하는 데 한동안 몰두하였다. 한편에서 ‘나제즈다(희망)’ 또는 ‘앞으로’라는 이름의 한국인 협동농장을 만들어 동포들의 정착을 도와주었다. 1923년 1월 상하이(上海)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시작되었다. 상해파 고려공산당에서 군인 위원으로 추천받아 회의에 참석하고자 2월 11일 니콜스크를 떠나 하얼빈·창춘·펑톈(奉天)·톈진(天津)을 거처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전 민족적 항일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기대와 달리 창조파와 개조파 사이에 벌어진 논쟁으로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였다. 9월에 스위스인이 운영하는 기선(汽船)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24년 3월 고려구락부를 조직하여 여러 곳과 연락을 취하며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검토하며 독립 방안을 논의하였지만, 사실상 민족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신한촌(新韓村)과 니콜스크에서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고 꽃을 가꾸는 등 한가로이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1925년 2월 21일 서울에서 아내가 홀로 찾아와 7년 만에 만났다. 아내는 3월 11일 서울을 향해 떠났다. 7월 5일 아내와 자녀들이 니콜스크에 도착하였다. 『시대일보(時代日報)』 1925년 6월 27일 자에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시베리아로 갈 작정으로 아내가 경찰에 여행권을 신청하였지만, 허락을 얻지 못하자 세 자녀와 함께 사라졌는데 종로경찰서에서 행방을 조사 중이라는 기사가 있다. 니콜스크시에서 일시 거주하다 1926년 봄 수청의 다우지미 서개척(西開拓)에 집을 지어 정착하였다. 그곳에서 장남 수범(秀凡)이 태어났다. 1927년 개척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수청의 난채시(蘭採市)에 위치한 일명 한성동에 완전히 정착할 생각으로 이주하여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1929년 1월 31일 넷째 지희(智姬)가 태어났다. 1932년 봄부터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여 변강 합동국가보안국의 소수민족 부서에서 한국어·일본어·중국어 통역으로 일하였다. 7월 24일 다섯째 기범(奇凡)이 태어났다. 1934년경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려사범대학의 초청으로 이주하였다. 대학에서 일본어와 군사학을 가르쳤다. 1936년 가을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9월 29일 연해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인 자유박탈형을 선고받았다. 1937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가족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까라간다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1939년 2월 4일 2년 반을 복역하고 석방되자, 3월 가족이 있는 까라간다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독일인 농장인 코민테른 콜호스에서 작업부로 일하였다. 1939년 4월 5일 가족을 만난 지 한 달 만에 다시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 갇혔다. 12월 17일 모스크바의 재판에서 간첩죄로 강제노동수용소 8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0년 1월 17일 러시아 북부에 있는 꼬미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회 소속의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 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수용소의 부설 병원에서 비타민 결핍에 의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에서는 그의 사망 날짜가 1월 2일·14일·26일 등으로 되어 있다. 1956년 재심에서 3년형 선고를 받은 1936년의 재판이 잘못되었다며 무죄를 선고받았고, 8년 수감을 내린 1939년의 재판도 1959년 2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재판소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카자흐스탄에서는 1993년 4월 14일 선포된 정치적 탄압에 의한 희생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에 의거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 저술로는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신주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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