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희직
裵羲稷1883. 1. 19 ~ 1969. 8.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9) 1883년 1월 19일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서면(西面) 왕피리(王避里)에서 배영홍(裵永弘)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북 울진군 원남면(遠南面) 갈면동(葛綿洞)이다. 본관은 흥해(興海)이며, 자는 의중(義仲), 별명이 광촌(光村)이다. 일찍이 한학을 닦아 문장이 선비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1919년 3월 18일 동지 한영육(韓永育)·나부석(羅富碩) 등과 함께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창수동(蒼水洞)의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한영육은 1906년 3월 영해(寧海)에서 의병을 일으킨 신돌석(申乭石)부대의 도선봉장(都先鋒將)이 되어 영양(英陽)·영덕·영해·평해(平海)·울진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했던 인물인데, 평소 독립투쟁에 뜻을 같이하며 연락하고 지내던 동지였다. 창수면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 1시부터 시작된 영해면 만세시위에 이어 오후 4시부터 전개되었다. 영양군의 유지 이종구(李鍾龜)는 3월 18일 영해면 만세시위 소식을 듣고 동참하기 위해 3월 19일 창수면 오촌동(梧村洞)과 삼계동(三溪洞)의 주민 수십 명과 함께 영해로 가던 중, 신기동(新基洞)에서 지역민들을 만나 창수면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다. 이리하여 신기동의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함께 주민 약 150명을 권유하여 창수면으로 향하였다. 오후 4시 창수동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400여 명으로 인원이 늘어났다. 동지 한영육과 함께 창수면에서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창수주재소를 향해 행진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곤봉·도끼 등을 든 군중과 함께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군중이 일제 경찰의 대검을 탈취하자 경찰들은 재빨리 피신하였다. 이때 주재소의 청사와 숙사 등 3동을 파괴하였고, 각종 서류와 가구·의류·식기 등을 훼손하였다. 계속하여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오후 7시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3월 19일 일제 군경들의 대대적인 검거작전으로 붙잡혀 조사를 받고 기소되었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공무집행방해죄, 건조물손괴죄, 기물손괴죄, 공문서훼기죄, 상해죄,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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