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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수

裵敏洙

1896. 10. 8 ~ 1968.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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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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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淸州)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청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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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국민회 조선지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3)

관련 사건

  • · 성진군 성진면 3.1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3) 1896년 10월 8일 충청북도 청주군(淸州郡) 사주면(四州面) 금천동(金川洞)에서 아버지 배창근(裵昌根)과 어머니 장희운(張喜云)의 독자로 태어났다. 배창근은 대한제국 군대 청주진위대(淸州鎭衛隊) 부교(副校)로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전쟁에 투신하여 그해 8월 일본군 2명을 처단하였다. 이 일로 1908년 여름 붙잡혀 교수형을 받고 사망하였다. 아버지를 여읜 후, 청주의 양반 지주였던 외가의 도움으로 성장하였다. 7세부터 3년간 한학 교육을 받았다. 이후 북장로회 선교사가 운영하는 청남기독교소학교에 입학하여 16세인 1912년까지 재학하였다. 1913년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진학하였다. “조국과 신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할 수 있는 기독교 동료”를 사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교회나 성경독회·기도회 등 종교 집회와 스포츠·음악 활동 등 여가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학생들과 교류하였다. 특히 노덕순(盧德淳)·김지수(金智洙)·이보식(李輔植)·박인관(朴仁寬)·김형직(金亨稷) 등 선배들과 활동하였다. 1913년 여름 평양(平壤) 기자묘(箕子墓) 숲에서 김형직·노덕순과 함께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서하는 단지혈서서약(斷指血書誓約)을 하였다. 1917년 3월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 조선지회를 조직하여 통신원 겸 서기로 활동하였다. 조선지회는 하와이 국민회 지도자 박용만(朴容萬)의 지도에 따라 숭실중학 출신인 장일환(張日煥) 등 하와이국민회와 연계된 국내 청년과 만주의 백세빈(白世彬)이 주도한 비밀결사이다. 1917년 2월 김형직 등과 함께 지회 결성에 동의하여 조직을 결성하였다. 조선지회가 설정한 당면 활동 목표는 곧 도래할 결정적 시기에 대비하여 국내·미주·만주 독립운동 세력을 연결하고 간도에 독립전쟁을 위한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지하조직망을 확대하고 연락사업과 선전활동을 전개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지회 활동으로 1918년 1월 20일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틀 후 평양경찰서로 이송되어 장일환·백세빈·김병두(金炳斗) 등 동료 24명과 함께 혹독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 1918년 3월 16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9년 2월 8일 풀려나 함경북도 성진(城津)으로 이동하였다. 성진에서 선교사 그리어슨(Robert Grierson), 욱정교회 목사 강학린(姜鶴麟) 등과 교류하였다. 그해 3월 성진지역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함께하였다. 강학린·서재영(徐在英)·김원배(金元培)·김성우(金聲宇)·이화선(李化善) 등 성진지역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께 제동병원(濟東病院)에서 수차례 회합을 가졌다. 3월 7일 그리어슨의 사택에서 회합을 갖고 만세운동 준비 작업을 서두르기로 합의하였다. 그리어슨 선교사 구내 주택에서 선언서와 격문 3만매를 인쇄하고, 10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3월 10일 오전 10시 제동병원 앞 광장에 5천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선언서 낭독과 기도 및 연설이 있은 다음 강학린 등과 함께 군중을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 시위에 놀란 일제 경찰은 나남(羅南)의 일본군 기병대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3월 11일 다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이날은 경찰, 군인, 소방대 등 100여 명의 일제 군경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를 한 끝에 1명이 사망하고 9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강학린을 비롯한 30여 명과 함께 끌려갔다. 1919년 6월 28일 1심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에 벌금 30원, 노역 30일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는데, 그해 9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심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다시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11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함흥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3년 1월 독립운동 현황을 살피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4개월간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에 체류하며 독립운동의 최고기관과 방략을 논의하기 위해 해외 민족운동 진영이 총동원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참관하였다. 중국에서 돌아와 숭실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4년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로 진학하여 1928년 3월 졸업하였다. 숭실전문 재학 중 조만식(曺晩植)에게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1930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31년 5월 21일 시카고(Chicago) 매코믹(McCormick)신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5월 4일 졸업하였다. 귀국 후 1933년 9월 장로교 총회 농촌부 사무국 초대 총무를 맡아 본격적으로 기독교 농촌운동을 전개하였고, 1934년 장로회 목사가 되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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