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동석
裵東奭1889. 3. 22 ~ 1924. 8.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3월 22일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김해면(金海面) 동상동(東上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분성(盆城)이고, 어릴 때 이름은 만복(萬福)이다. 아버지 배성두(裵聖斗)는 1891년 부산(釜山)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1894년 김해로 귀향하여 경남 지방 최초의 기독교회인 김해교회를 창립하였다. 1906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의 추천으로 대구(大邱)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입학하였다. 1907년 「학도결의문(學徒決議文)」 낭독 사건을 주도하였다. 학교 대표로 학생 20명과 함께 “우리 계성(啓聖)의 학도 20인은 조선 땅이 왜놈의 발아래 더럽혀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이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노라”고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고, 일본인 상가의 유리창을 향해 돌을 던졌다. 이 일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의 충돌이 일어나, 출동한 일제 헌병에 의해 학생 20명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때 붙잡혀 3개월간 대구경찰서에서 옥고를 겪고 풀려났다. 1908년 3월 계성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경신학교(儆新學校)로 전학하였다.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木浦)에 있는 유일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였고, 1915년 경성연합의학전문학교(京城聯合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1915년 7월 15일 결성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다. 1916년 5월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기 위해 서간도로 들어가 독립운동가들은 만난 후 귀국하였다. 1917년 봄 경성연합의학전문학교에 복학하여 수학하던 중, 다시 1918년 봄 광복회 대구지부의 명령으로 상하이(上海)에 파견되었다. 이후 만주로 들어가 김좌진(金佐鎭)을 만난 뒤, 상하이로 가서 이동녕(李東寧)에게 군자금을 전달하고 이듬해 2월 귀국하여 경성연합의학전문학교 2학년에 복학하였다. 1919년 2월 12일과 14일 양일간에 김원벽(金元璧)·김형기(金炯基)·윤자영(尹滋英)·김문진(金文珍)·한위건(韓偉健)·이갑성(李甲成) 등과 함께 경성연합의학전문학교 구내에서 음악회를 가장한 회의를 열고 만세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2월 24일에는 동지를 모집하라는 이갑성의 부탁을 받고 마산(馬山)으로 내려가 2월 25일 이상소(李相召)·손덕우(孫德宇)·이승규(李承奎) 등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였다. 1919년 3월 1일 학생 대표로 탑골 공원에서 종로경찰서 앞까지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5일에는 남대문 정거장 광장에서 경성의전 학생 박주풍(朴疇豊)·김봉렬(金鳳烈)·서영완(徐永琬) 등과 함께 독립기를 앞세운 수백 명의 군중 속에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3월 26일에는 연건동(蓮建洞)에서 임경숙(林敬叔)·이순신(李順信)·이창규(李昶奎)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6일 연건동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20년 4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