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후도
朴後度1897. 1. 12 ~ 1950. 8. 2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6)
관련 사건
- · 의성군 비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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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06) 1897년 1월 12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 서부동(西部洞, 현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홍식(朴洪植)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13일과 16일 비안면 서부동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2일 비안면 동부동(東部洞, 현 동부리) 김석근(金碩根)의 집에서 임재호(林在虎)·박홍섭(朴洪燮) 등과 함께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전 민족이 절대 독립을 쟁취하고자 봉기하는 이때, 우리 고장에서만 일제의 강압적 지배에 침묵으로 동조할 수는 없다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고 향리에서 만세운동을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곧바로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120개를 제작하였다. 다음날인 3월 13일 저녁 8시 비안면 서부동시장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전날 비안공립보통학교(比安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거행하였고, 이어서 이틀 연속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것이었다. 당시 장터에는 소식을 듣고 모인 주민들과 때마침 동부동으로부터 서부동 장터를 향해 시위 행진을 하던 군중이 합세하여 수백 명을 헤아리는 규모의 시위대가 집결하였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일제 군경이 출동하여 시위대를 해산하였고, 이 과정에서 함께 시위를 주도한 김석근이 붙잡혔다. 3월 13일 시위 후 임재호·박홍섭 등과 협의하여 후속 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나섰다. 이때 박말수(朴末秀) 등이 가담하여 함께 준비하였다. 3월 1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제작한 뒤, 주민들에게 이러한 소식을 전파하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거사 당일 오후 3시 임재호·박홍섭 등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서부동시장에 모인 50여 명의 군중들에게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며 ‘독립만세’를 앞장서서 외쳤고, 동부동 일대를 행진하며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출동한 일제 군경에게 붙잡혔다.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동일한 형량을 다시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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