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동
朴河東미상 ~ 1919
포상 정보
- · 애국장(1998)
관련 사건
- · 재령군 북률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8) 자료의 한계로 생년월일과 출신지는 확인할 수 없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재령(載寧) 강동촌교회(江東村敎會) 장로 박하동(朴河東)은 평양감옥에서 죽었다”는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강동촌교회는 황해도 재령군(載寧郡) 북률면(北栗面)에 소재한 교회이며, 이에 근거하여 북률면(北栗面) 출신이거나 북률면 만세운동 당시 이곳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재령군 만세운동은 황해도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으로, 3월 3일에 재령군 화산면(花山面) 서림리(西林里), 3월 5일에는 재령군 남률면(南栗面) 신환포리(新換浦里)의 만세운동 계획되고, 3월 6일 남률면 해창리(海昌里) 만세시위, 그리고 3월 9일 재령면(載寧面) 읍내 만세시위로 확산되었다. 특히 3월 9일 만세시위는 1,000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고, 일제 군경의 발포로 부상자까지 발생하였다. 이때 강동촌교회 장로로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였다. 북률면에서는 기독교도들이 중심으로 3월 초순부터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남지리(南芝里)에 거주하는 교회 조사(助事) 김병식(金秉植)은 3월 5일부터 3월 6일 무렵 노동섭(魯東燮)과 함께 독립선언서 400장을 등사한 후 김상준(金賞俊) 등을 통해 사전에 배포하였다. 김병식과 동신흥리(東新興里) 교회 집사 김위식(金緯湜)은 교사 김복현(金福鉉)·김병선(金秉善)에게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150장을 만들도록 하였다. 이어 3월 9일 일요일을 맞이하여 목사 윤문옥(尹文玉)은 예배에서 신자들에게 다음날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3월 10일 오전 9시 북률면 내종리(內宗里) 상거동(上巨洞)에 위치한 숭의학교(崇義學校) 앞마당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윤문옥을 비롯한 기독교도들이 중심이 된 1,0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독립가를 부르기도 하였다. 시위대의 숫자가 4,500여 명에 이르렀으며, 시위는 내종리 시장으로 확대되었다. 일제는 내종리 헌병주재소의 인력만으로 시위대를 제압할 수 없게 되자, 재령헌병분대에서 추가로 헌병 4명을 내종리로 파견하도록 하였다. 시위대는 일제 군경의 진압에 저항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일제 군경의 총기 1정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향하여 총을 쏘아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재령군에서는 3월 하순과 4월 초순 만세시위가 재개되었다. 4월 4일 오후 9시에 남률면 해창리(海昌里)에서는 개신교인이 중심이 된 500여 명이 해창헌병주재소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교사 김두영(金斗永), 사립오산학교(私立五山學校) 학생 윤택진(尹鐸振) 등 20명이 헌병대에 붙잡혔다. 4월 7일 오후 10시에는 개신교인이 중심이 된 시위대 300여 명이 남률면 신환포헌병주재소에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4월 7일 북률면 내종리에서도 300여 명의 시위대가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일제 군경은 사리원(沙里院) 주재 일본군 보병 10명을 현지로 파견해서 시위를 진압하게 하였다. 북률면, 남률면을 중심으로 한 1919년 3~4월의 재령군 만세시위에 참여했단 이유로 붙잡혀 평양감옥에 이송되었다. 현재까지 재판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붙잡힌 후 조사를 받고, 평양감옥에서 수감 되는 과정에서 일제 군경의 폭력과 고문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