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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섭

朴昌涉

187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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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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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황주(黃州)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황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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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황주군 황주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흑교면(黑橋面) 원동리(院洞里)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48세로, 1872년생으로 추정된다.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2일 황주읍(黃州邑) 남천 장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平壤)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황주군 황주읍(黃州邑)의 천도교구 책임자들은 평남 중화군(中和郡)의 천도교인 최창룡(崔昌龍)으로부터 만세운동 소식과 독립선언서 10부를 전달받았다. 황주읍 천도교구의 교훈(敎訓) 황기타(黃己拕)는 소(小) 교구장 김성준(金聲駿)과 함께 천도교인이 많이 모이고 남천 장터가 열리는 3월 2일에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천도교구실 사람들은 천도교인들에게 남천 장터 시위 계획을 알리며 참여를 독려하였다. 김성준과 황기타는 평소 독립에 뜻을 두었던 황주면(黃州面) 황강리(黃崗里)의 최석길(崔錫吉)과 김광섭(金光燮), 성남리(城南里)의 김병식(金炳植), 벽성리(碧城里)의 조진영(趙鎭榮)에게 남천 장터에서의 만세운동에 참여해 줄 것을 권유하여 참여를 약속받았다. 1919년 3월 2일 오후 2시에 남천 장터에서는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열렸다. 황기타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시위를 이끌었고, 조진영은 남천 장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때 만세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남천 장터에서 출발하여 행진하다가 황주경찰서에서 일제 경찰과 대치하였다. 대치 국면에서 김병식과 강형섭(康亨燮)이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자, 표정일(表正一)·이준근(李俊根)·최석길의 주도 아래 4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끌려간 사람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면서 경찰서 안으로 진입하였다. 경찰서에서 집기를 부수자, 이를 일제 경찰들이 저지하였다. 경찰서를 나온 이후 기독교 예배당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기독교인들이 시위대에 참여하였다. 그 후 시위대 200여 명과 함께 천도교당으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급습한 일제 경찰과 헌병에게 시위 주도자 황기타·최석길·김광섭·표정일을 비롯한 8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붙잡혔다. 당시 황주경찰서는 인근 지역에 증원을 요청하는 한편 소방조(消防組)까지 투입하여 시위 저지에 나섰고 참여 인사들을 색출해서 체포하였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2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다시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조선 민족의 의무를 표시하기 위해 만세를 화창(和唱)한 것은 아무런 치안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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