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서
朴昌瑞미상 ~ 1919. 3.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관련 사건
- · 정주군 동주면
- · 정주읍 3.1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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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6)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출신이다. 출생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정주군 동주면(東州面) 봉명동(鳳鳴洞)에 거주하였고, 3월 31일 동주면과 읍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게 희생되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 이전부터 정주의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은 서울의 만세운동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 경의선(京義線)이 통과하여 서울이나 평양(平壤)·신의주(新義州) 등 주요 도시와의 교통이 편리하여 외부 소식도 빨리 전파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주 지역의 만세시위는 곧바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3월 2일 교원과 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시도하였으나 학교가 위치한 갈산면(葛山面) 일부 지역에 국한된 소규모 시위에 불과하였고, 정주 전 지역으로 확산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시위를 선동하고 독립선언서를 소지하였다는 이유로 3월 4일과 6일 잇따라 교사와 학생들이 정주헌병분대에 붙잡혀 가는 일이 발생하는 등 일제의 경계가 매우 삼엄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도교 측이 대규모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천도교 측의 중진 간부인 김진팔(金鎭八)이 서울의 49일 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중앙의 비밀 지령을 받게 되었다. 그는 2월 25일에 정주로 돌아와 천도교 정주교구장(定州敎區長)을 비롯하여 여러 천도교 간부들과 곽산교구장(郭山敎區長) 등을 비밀리에 만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삼엄해진 경계로 곧바로 시위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마침내 3월 31일 장날로 시위 날짜를 결정하고, 각 면에 연락하여 각 면별로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정주읍내로 모이기로 하였다. 동주면은 신안면(新安面)·고현면(高峴面)과 함께 정주읍성의 동문으로 진입하고, 이언면(伊彥面)·덕달면(德達面)·아이포면(阿耳浦面) 등에서는 남문으로, 그리고 임해면(臨海面)에서는 서문으로 진입하기로 하였다. 동주면 시위는 봉명동 산두부락(山頭部落), 일명 궁을촌(弓乙村) 사람들이 주도하였다. 이곳은 천도교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동네였다. 박일경(朴一擎)과 천도교인 승인집(承仁楫) 등이 태극기 2,000매를 제작해서 면민들에게 배포하고 장날의 시위에 전원 참가하게 하였다. 시위 당일이 되자 면민들은 동주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서기(面書記)와 고원(雇員)을 위협하여 함께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면사무소와 주재소의 각종 문서를 함께 소각한 후 만세 삼창을 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약속한 대로 신안면과 고현면의 시위대와 합류하여 정주읍성 동문 밖 장자현(長字峴)에 이르렀다. 당시 정주읍내에는 천도교도 수백 명이 미리 들어와 있었는데, 약속한 대로 정오가 되자 정주우편국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곧이어 각 면의 시위대와 일반 주민들이 합세하여 정주읍 일대에는 2만 5,000여 명의 대규모 군중이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헌병과 평양의 77연대에서 파견된 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하였다. 정주면의 시위대는 읍내에서 울린 총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동문으로 돌진하였다. 신시가(新市街)에 있던 일제 헌병과 수비대는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소방대(消防隊)와 엽부(獵夫)는 엽총을 들고 성호(城壕)에서 잠복해 있다가 일제히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하였다. 그럼에도 시위대는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여 남문 밖에 이르렀지만, 결국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날 동주면에서 정주 읍내로 이어진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제 군경의 총격을 받고 희생되었다. 이날 사망자가 50여 명에 달하였고, 동주면 출신만 해도 12명이 총격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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