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수
朴寅洙185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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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2) 함경남도 신흥군(新興郡) 영고면(永高面) 연동리(淵洞里) 출신이다. 판결문에는 1919년 당시 나이를 60세로 기록하고 있어, 1859년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의 한계로 성장과정이나 집안 내력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 농업에 종사하며 1919년 3월 12일 영고면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신흥군의 만세운동은 3월 초순 인접 지역인 함흥(咸興)을 통해서 만세시위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작되었다. 확인되는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 10일 오전 9시 30분 동고천면(東古川面) 흥경리(興京里)에서 일어났다. 지식인 정재각(鄭在珏)과 신흥공립보통학교 4학년 유춘갑柳(春甲)이 중심이 되어서 신흥공립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3월 12일에는 신흥군 원평면(元平面) 최양동(崔陽洞)에서 한진우(韓鎭愚)가 원평보통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일본 군경에 의해서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었다. 적극적으로 주도한 영고면 만세시위도 그 연속선상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박장원(朴長元)과 함께 박두송(朴斗松)·정문조(鄭文朝)·정영일(鄭英一) 등을 만난 자리에서 3월 12일 영고면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박장원 등과 함께 영고면 주민들에게 3월 12일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도 제작하였다. 거사일인 1919년 3월 12일, 면사무소 앞에서 1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박장원과 함께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대가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쳤다. 한편 오후 8시 무렵에는 영고면 동평리(東坪里)에서 이용재(李鏞齊)·이인숙(李寅淑)을 비롯한 개신교 인사들이 주민 50여 명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마을 일대를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영고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일본 군경에 붙잡혀 모진 고초를 겪은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23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에서 그 해 7월 19일 기각되었다. 다시 불복하고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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