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석
朴有石1896. 7. 8 ~ 1935. 12.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1896년 7월 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신덕동(新德洞)에서 태어났다. 이후 금소동(琴韶洞)으로 이주하였고, 용인(傭人)으로 일하면서 1919년 안동군 임하면 금소동과 신덕동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임찬일(林贊逸), (林燦逸)·노말수(盧末守)·임동숙(林東淑)·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석현(林錫鉉) 등 임하면 청년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주도자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끈 임찬일은 고종의 인산(因山)을 보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다가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이후 만세운동을 함께 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임찬일을 통하여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였으며, 조국의 해방을 위해서는 국내에서도 독립을 위한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듣고 크게 고무되어 참여를 결심하게 되었다. 다른 주도자들과 비밀리에 만나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1919년 3월 16일 길안면(吉安面) 장날을 거사일로 택하였다. 그러나 당일에 주민들의 호응이 적자 날짜를 3월 21일로 연기하고, 금소동으로 거사 장소를 바꾸었다. 거사 당일 집에서 나와 약속 장소로 향하였다. 저녁 6시 경 마을 앞 약속 장소에는 주도자들과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함께 하기 위하여 모인 주민 100여 명이 있었다. 주도자들은 군중들 중앙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들의 선창에 주민들도 호응하며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금소동에서 시위 열기가 고조되자 주도자들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거리를 행진하여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가 있는 신덕동으로 향하였다. 저녁 9시 경 신덕경찰관주재소에 이르러 그곳을 포위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소리에 급히 출동한 일본 경찰들은 평화적으로 시위를 하고 있는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갑작스런 총성에 시위대는 부득이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임호일(林浩逸)이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으며, 신필원(辛必元)도 중상을 입는 등 사상자가 생기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밤 11시 경 잠시 후퇴했던 주도자들은 흩어진 군중을 모아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사상자 발생에 분노한 주민들이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500명이 넘는 군중이 주재소로 모여 들었다. 주도자들이 먼저 주재소 출입문과 유리창을 향하여 돌을 던지자 군중도 동참하여 돌을 투척하였다. 임찬일·노말수 등과 함께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 안에 들어가 벽과 기물을 부수고 문서를 파기하였다. 이어 가까운 거리에 있는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돌과 몽둥이로 벽과 집기들을 파괴하고, 공문서도 파기하였다. 경찰관주재소와 면사무소는 지붕과 기둥만 남은 채 분노한 시위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후 시위대는 자진하여 해산하였다. 다음날부터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주도자 검거에 나서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5월 29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고,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그 해 9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어 치안방해는 무죄로 인정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징역 1년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