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식
朴元植1882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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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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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구성면(龜城面) 이구동(犁邱洞) 출신이다. 1919년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38세로, 1882년생으로 추정된다. 만세운동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31일 구성군 구성면 남문(南門) 밖 장날에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구성군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일 방현면(方峴面) 남시(南市)에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3월 18일 사기면(沙器面) 신시(新市)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구성면에서는 3월 31일 남문 밖에서 수백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독립사상을 깊이 품고 있었으나 시기를 만나지 못해 뜻을 펴지 못하던 중,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로 독립문제가 공인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평소 품고 있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서울부터 시골 벽지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으므로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마침 남문 밖에서 만세시위가 벌어지자 이에 동참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는 오전과 정오 두 차례에 걸쳐 벌어졌다. 천도교인 등 수백 명이 참여하여 성내 진입을 시도하는 등 매우 격렬하게 만세시위가 진행되었다.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제지하려 하였으나, 구성헌병분견소 헌병만으로 시위대 진압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인근 창성군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후 도착한 일본군이 헌병과 함께 총을 쏘며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상자 2명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였다. 시위대는 오후 5시경 해산하였고, 이후 동지들과 함께 일본 헌병에 붙잡혔다. 일자 미상일에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조선 민족으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죄가 될 수 없다.”고 무죄를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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