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보
朴元甫1890. 7. 1 ~ 1957. 6.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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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0년 7월 1일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학산면(鶴山面) 지내리(池內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래석(朴來碩)을 사용하였다. 1919년 영동군 학산면 만세시위와 학산주재소 습격을 주도하였다. 학산면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학산리 주민 200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 관공서를 공격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이래 4월까지 지속적으로 일제 관공서를 습격하는 격렬한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학산면에서 전개된 격렬한 만세시위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인 만세운동의 영향과 일제의 노동력 수탈에 대한 강한 불만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3월 29일 만세운동에 이어 다음날인 3월 30일에는 학산면과 경계를 접한 양산면(陽山面) 가곡리(柯谷里)의 인천이씨(仁川李氏) 가문에서 이채연(李彩然)·이관연(李觀然)·이헌주李(憲周)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양산면과 학산면에서 도로공사에 동원된 주민들과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학산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고, 일본 경찰을 협박하여 만세운동에 참여하게 하였다. 4월 3일에는 양봉식(梁鳳植)·이기영(李機榮)·전재득(全在得) 등의 주도로 면소재지인 서산리(鋤山里)의 호미실장터에서 300여 명의 주민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평소 일제의 통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지내리의 김승림(金升林)은 일제의 탄압으로 4월 초 이후 학산면의 만세시위가 중단된 상황에서 새로운 만세운동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의하고, 서당에서 함께 공부했던 지인들을 중심으로 동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전부터 국권 상실에 대한 울분을 공유하며 함께 시국을 개탄해 왔었기에, 김승림이 만세운동을 제안하자 곧바로 동참하게 되었다. 김승림을 중심으로 여규병(呂圭炳)·여구일(呂九一, 여규일(呂圭一))·여구방(呂九芳), 여규방(呂圭滂))·여중선(呂中仙)·박두업(朴斗業)·정화중(鄭化中) 등과 함께 여러 차례 비밀 회합을 가지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불만이 높은 영동-무주 사이 도로공사의 주민 동원일인 4월 16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공사에 많은 주민들이 동원될 것이기 때문에 공사 현장에서 즉시 주민들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호소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1919년 4월 16일 오전 김승림·박두업·정화중·여규병·여구일·여구방·여중선 등과 함께 영동-무주 간 도로공사 현장에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공사에 동원된 면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곧바로 수백 명의 주민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승림·박두업·여규병 등과 함께 시위대를 지휘하여 우선 주민들의 원한이 높았던 학산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주민들의 주재소 습격을 독려하여 기물 등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 후 시위대를 지휘하여 일제가 영동-무주 간 도로에 가로수로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뽕나무 밭으로 가서 묘목 수만 그루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등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김승림·여구일 등과 함께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6월 13일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도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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