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秉箕
洪秉箕1869. 1. 2 ~ 1949. 1.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고려혁명위원회
- · 고려혁명당
- · 삼일동지회
포상 정보
- · 대통령장(1962)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장(1962) 1869년 1월 2일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금사면(金沙面) 이포리(梨浦里)에서 아버지 홍익룡(洪益龍)과 어머니 한익화(韓益嬅)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운해(運晦), 도호는 인암(仁菴)이다. 1892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었고, 1893년 충북 보은군(報恩郡) 속리면(俗離面) 장내리(帳內里)에서 개최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冤運動)에 참여하였다. 1894년 10월 제2차 동학농민운동 시 여주에서 동학농민군을 일으켰다. 이후 이종훈(李鍾勳)·손병희(孫秉熙) 등의 지휘 하에 충주(忠州)와 공주(公州) 등지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동학농민운동 후 손병희·이종훈 등과 최시형(崔時亨)을 수행하다가 1898년 최시형 사후 손병희를 지지하였다. 손병희의 지도하에 1904년 대동회(大同會)·중립회(中立會) 등의 민회를 조직하여 갑진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2월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한 이래 교단의 분립으로 운영이 곤란해지자 천도교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모든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1907년 고문, 1908년 경도사(敬道師)에 올랐고, 시무하던 직무도 1910년 현기사장(玄機司長) 서리, 1911년 대종사장(大宗司長)으로 상향되었다. 1910년대 전반 대종사장, 1916년 이후 장로(長老)로서, 천도교의 중요사항을 결정하여 교세를 신장시키고 교인을 교육하였다. 1918년 말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사실을 파악하고 “우리 조선도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하여 독립이 될 것이다”, “정의와 인도로써 성심껏 하면 무슨 일이든지 된다”라는 판단과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1919년 1월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이 손병희와 협의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1919년 1월 상순 권동진에게 “독립운동을 하려면 동지를 모아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고, 그해 2월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이 제창되고 있으므로 우리 조선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어떠냐?”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2월 25일경 권동진으로부터 민족대표 참여를 제의받자 흔쾌히 참여하였다. 2월 27일 저녁 김상규의 집에 가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2월 28일 저녁 손병희의 집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식의 개최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泰和館)으로 변경하는 등 독립선언식 개최와 관련된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 가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 한용운(韓龍雲)의 연설을 들은 후에 민족대표와 함께 독립만세를 삼창하였다.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직후, 현장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일본 관헌의 가혹한 취조와 신문에도 불구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며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의 “피고는 금후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렇다. 기회만 오면 운동을 할 것이다”라고 답할 정도로 강한 독립의지를 천명하였다. 오랜 재판 끝에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1921년 11월 4일 풀려났다. 풀려난 후 최동희(崔東曦)·오지영(吳智泳) 등과 함께 천도교 혁신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개량적 민족운동을 추진하던 천도교중앙총부의 집권파의 노선에 반대하여 교인의 대표인 의정원(議正員)을 선출한 후 이들로 구성된 의정원(議正院)의 결의로 교회의 중요사무를 처리하려고 하였다. 또 종의원·종법원·종무원의 삼원제를 실시하여 교권의 분립을 이루고, 선거로써 교주를 선출하고, 교주와 수위의 봉급을 동일하게 하여 천도교의 평등 이념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천도교 내 혁신운동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1922년 말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22년 7월 14일 이종훈(李鍾勳)·송헌(宋憲)·이동락(李東洛)·김광희(金光熙)·이동구(李東求)·김봉국(金鳳國) 등과 서울에서 고려혁명위원회(高麗革命委員會)를 조직하였다. 이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고려혁명위원회는 외교부장 최동희를 러시아 연해주에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동휘(李東輝) 등과 협의한 후 소비에트러시아의 후원을 얻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4년 4월 5일 천도교비상혁명최고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최동희 등을 통하여 천도교와 소비에트러시아와의 제휴를 맺고, 소비에트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양성한 후 대일항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소비에트러시아가 일소(日蘇)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한 탓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최동희와 김광희 등이 정의부(正義府)의 정이형(鄭伊衡)·양기탁(梁起鐸), 연해주에서 만주로 온 주진수(朱鎭洙)·이규풍(李奎豊) 등과 협의하여 1926년 3월 지린(吉林)에서 정의부·천도교연합회·형평사의 삼각동맹으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창당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고려혁명당에 참여하여 당원을 모집하고 조직을 확장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6년 12월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종락이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체포되어 고려혁명당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1927년 1월 29일 만주에서 신의주경찰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노령임에도 2년 가까이 신문과 조사를 받다가 1928년 10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200일 본형 산입)을 받았다.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29년 7월 5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45년 광복 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3·1정신을 고취하였다. 1945년 12월 3일 독립촉성선서식을 거행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를 천명하였다. 1947년 2월 9일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동학혁명’ 53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여 ‘동학혁명’의 의의를 전파하는 활동을 전개하는 등, ‘동학혁명’과 ‘3·1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담긴 뜻을 받들어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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