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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준

朴英俊

1885. 4. 25 ~ 1943.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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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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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동래(東萊)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동래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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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4월 25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기장면(機張面) 연화리(蓮花里, 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연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아버지는 박봉학(朴奉學)이다. 구용전(具龍傳)과 결혼한 후 동래군 일광면(日光面) 이천리(伊川里)로 이주하여 망건 제조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5일 기장면 읍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4월 11일 일광면 이천리(伊川里)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은 기장면 읍내시장 장날이었기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이 직접 만든 망건을 팔고 있었다. 그때 김수룡(金壽龍)·김도엽金(度燁)·권철암(權鐵巖) 등이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쓴 큰 깃발을 흔들고 장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모습을 보고 급히 장사하던 물건을 치운 후 시위대에 합류하여 만세를 부르면서 시장을 행진하였다. 기장면 읍내시장 시위가 끝난 후 이천리의 집으로 돌아와서 마을 주민들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상세히 전달하였다. 그리고 마을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민들을 설득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주민들과 4월 1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만세시위 준비를 하였다. 거사 당일 저녁 7시 무렵, 이천리 청년 5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시작했을 때,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들의 만세 소리에 마을 주민들이 호응하며 시위대는 늘어났고, 만세시위는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새벽녘에 일본 헌병과 경찰이 마을을 급습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결국 붙잡혀 주재소로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6월 1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6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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