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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섭

朴榮燮

1880. 11. 1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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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영섭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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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홍원(洪原)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홍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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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2) 1880년 11월 16일 함경남도 홍원군(洪原郡) 용천면(龍川面) 중평리(仲坪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함남 풍산군(豊山郡) 이인면(里仁面) 신풍리(新豊里)에서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종교는 천도교이다. 1919년 3월 14일 이인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인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0일 이인면 원포리(院浦里)에 거주하던 김병식(金炳軾)이 자신의 집에서 천도교 풍산교구 봉훈(奉訓)인 맹시정(孟始楨)과 강희준(姜熙俊) 등을 만나면서 계획되었다. 강희준은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주도로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는 사실과 서울에서의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였다. 김병식과 맹시정은 바로 풍산지역 천도교의 중심 인물인 박인진(朴寅鎭)을 김병식의 집으로 초대하였고, 논의한 결과 3월 14일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일인 3월 14일 노원리(老院里) 방면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오는 군중을 이끌고, 이인면 신풍리(新豐里)에 있는 천도교 풍산교구으로 갔다. 천도교당에는 교구장 주병남(朱炳南)과 박인진·장세급(張世岌)·주두칠(朱斗七) 등 천도교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강한철(姜漢掇)·주희락(朱羲洛)·주진표(朱鎭豹) 등의 주도로 안산면 노은리(老隱里)에서 참석한 이들을 포함하여 2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이들은 함께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고 김창선(金昌善)과 박인진의 연설을 들은 후,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때 천도교당 안으로 난입한 풍산헌병분견소의 일제 헌병들이 천도교인들을 강제로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일제 헌병의 강제 진압 시도에 참석자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인면 신풍리에 있는 풍산헌병분견소 앞까지 행진하였다. 헌병분견소 앞에서 시위대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만세를 외치자, 헌병들은 칼과 몽둥이로 시위대를 해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헌병들의 야만적인 행동에 격분한 시위대 일부가 헌병분견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고자 하였다. 그때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4시경까지 펼쳐진 만세시위에서 과정에서 동료 20여 명과 함께 일본 군경에 붙잡혔다. 함흥 검사국으로 압송되어 모진 조사를 받은 후 기소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14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벌금 30원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 해 8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1919년 10월 23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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