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개
朴元介1892. 3. 22 ~ 191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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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4) 1892년 3월 22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가야면(伽倻面) 춘곡리(春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20대 후반의 청년으로 학문을 익히지는 못했으나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7척의 거구에 힘이 대단한 장사로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함안군 군북면(郡北面)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군북면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5일 고종 국상에 참여하고 돌아온 함안 지역 인사 조한휘(趙漢輝)와 한관열(韓灌烈) 등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며 계획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3월 10일 백이산(伯夷山) 기슭 서산서당(西山書堂)에서 논의되었다. 그 자리에서 거사 일시는 함안군 군북면의 장날인 3월 20일 정오에 군북면 장터에서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 등사와 태극기 제작, 그리고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책 선정 등의 준비 계획을 수립하였다. 준비 작업은 서산서당과 원효암(元曉庵) 의상대(儀湘臺) 등에서 이루어졌다. 서산서당에 모일 때는 한문 강학으로 위장하였고, 원효암 의상대에서 논의할 때는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일본 경찰과 밀정을 피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춘곡리 자신의 집을 만세시위 준비 장소로 제공하였으며, 군북면 각 지역의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20일 가야면의 군중들과 함께 장꾼으로 가장하여 군북면 장터로 향하였다. 오후 1시경 장터 인근 냇가에서 주도자 중 한사람인 조상규(趙相奎)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을 시작으로 수천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조용규(趙鏞珪)가 대형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섰을 때, 그를 호위하였다. 시위가 격화되면서 군중은 5,000여 명까지 늘어났고, 일본 군경의 진압도 비례하여 폭력적으로 변하였다. 군북면에 파견된 일본군 중포병대대가 착검한 총기를 휘두르며 진압에 가세하였다. 일본군이 주도자들을 붙잡으려고 하자 몸싸움을 전개하며 이를 저지하였다. 시위대는 기세를 올려 투석전을 전개하여 군북면사무소와 군북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하였다. 결국 일본 군경의 실탄 사격이 개시되면서 순식간에 20명이 사망하고 18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이때 현장에서 복부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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