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형우
南亨祐1875. 7. 27 ~ 1943. 3.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동청년당
- · 조선산직장려계
- · 조선국권회복단
- · 대한국민의회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국민당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83)
관련 사건
- · 1919년 만세운동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83) 1875년 7월 27일 경상북도 고령군 내곡면(乃谷面) 내상동(內上洞, 현재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읍내면 쾌빈리(快賓里)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호는 유석(瘐石)이다. 이명은 오일태(吳一泰)·남성민(男聖敏)이다. 1908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고, 이듬해 대동청년단(大東靑年團)에 가입하였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보성전문학교(보성법률상업학교) 법률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5년 2월 경북 달성(達城)에서 조직된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가입하였고, 3월에는 이우용(李雨用)·최남선(崔南善) 등과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稧)를 결성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원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산업총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4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와 국권회복단에서 모금한 5,000원을 소지하고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대표로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9년 4월 11일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법무차장에 선임되어 23일까지 활동하였다. 5월 10일 법무총장에 임명되어 7월 7일 사직하였고, 1920년 교통총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말에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의 단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10월 상하이 국민대표회의 기성회 위원에 선임되었고,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창조파와 개조파로 나뉘어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상황에서 1923년 3월 하순 김동삼·신채호·배천택(裵天澤)·김창숙(金昌淑)·유우국(柳佑國)·한진산(韓震山)·이중호(李重浩) 등과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국민당은 당원들 개개인의 지식과 경제적 능력을 높이고, 만주에 토지를 경작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독립군을 양성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국민대표회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국민당은 베이징(北京)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군자금을 모집에 주력하였다. 1924년 1월 서동일(徐東日)을 국내에 보내 경북 경산 등지에서 군자금 1,400여원을 모집하였다. 이듬해 1월 다시 그를 보내 군자금을 모았으며, 1925년 5월 재차 서동일을 보내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제 경찰에 체포됨에 따라 중단되었다. 서동일은 1923년 1월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한 이후, 국민당에 가입하고 재무부장을 맡았으며, 1925년 4월 14일 북경에서 조직된 다물단(多勿團) 단원이기도 하였다. 1924년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들어가는 서동일에게 특파원 신임장과 취지서 등을 활동하도록 하였다. 또한 1925년 3차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다시 서동일을 국내로 파견하는데, 이때 서동일이 다물단의 선언서와 특파원 신임장을 각 1장씩 지니고 있었다. 1928년 가족과 함께 하얼빈으로 이주하여 사설 학교를 운영하던 중, 류허현(柳河縣)에서 ‘공산당 관련’ 혐의로 중국 관헌에 붙잡혔다가 무혐의로 풀려났다. 1931년에는 수토병(水土病)으로 국내로 들어와 고향에서 요양하였다. 1943년 3월 13일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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