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의
朴容義1869. 12. 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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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1869년 12월 8일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서면(西面) 축동리(軸洞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서당에서 한학을 가르쳤고, 4월 10일과 21일 이천군 안협면(安峽面)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전국으로 만세운동이 펼쳐지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또한 이천 지역 천도교인을 통하여 독립선언서도 접하였다. 4월 4일 영양면(榮壤面, 낙양면)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이후 이천군에서 연이어 만세시위가 일어나는 것에 자극을 받아 향리에서도 만세운동을 펼칠 것을 결심하였다. 4월 9일 같은 마을에 사는 천도교인 장강환(張康煥)을 만나 만세운동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였다. 장강환도 그 자리에서 동의하면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다음날 거성리 안협시장에 장이 서는 것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뜻을 함께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오후 9시경 마을 구장 송원흥(宋元興)과 주민 김응순(金應順)을 불러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장강환과 함께 송원흥과 김응순에게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아직 만세를 부르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만세운동을 펼치자고 제의하였다. 이들이 제의에 동의하자 송원흥에게 구장 지위를 이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도록 하였다. 송원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음날 아침까지 주민들을 규합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하였고, 4월 10일 장강환·송원흥·김응순과 함께 80여 명의 주민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선두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앞장섰고, 장강환 등 주도자들이 주민들을 이끌고 안협면 읍내에 있는 안협시장으로 향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자, 장터에 있던 장꾼들도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시위대는 장꾼들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만세시위를 펼친 후 해산하였다. 안협시장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후 다시 한 번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번에도 장강환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4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웃 마을 사현리(四見里)에 있는 안협헌병분견소에서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하였다. 마을 주민들에게 ‘조선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이라’고 하며 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4월 21일 거사 당일, 장강환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사현동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헌병주재소 앞에 이르러 가슴 속에 숨겼던 태극기를 꺼내어 흔들며 큰 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시위대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펼쳤다. 시위 소식을 접하고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이 무력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때 장강환과 함께 현장에서 붙잡혔으며, 가지고 있던 태극기도 몰수당하였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결과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지만, 그 해 6월 2일 항소를 취하하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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