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龍根
朴根1883. 7. 3 ~ 1940. 8.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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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3년 7월 3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진주면(晋州面) 수정동(水晶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8일 진주군 진주면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진주군의 만세시위는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만 9차례이며, 추가로 6차례의 시위 계획도 있었다. 진주 최초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 경남 최대인 진주 시장의 장날을 기하여 읍내 중심부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위에는 일본 군경 추산으로 약 4,000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였고, 21일까지 매일 계속되었다. 진주의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된 계기는 고종 국상에 참가하기 위해 김재화(金在華)가 상경하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1일 진주로 돌아와 뜻을 같이하는 지역 인사들과 거사를 계획하며 비롯되었다. 이 거사 계획에 찬동하여 준비 모임에 참여하였고, 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이강우李(康雨)·권채근(權采根)·강상호(姜相鎬) 등도 함께 하였다. 거사일은 읍내 장날인 3월 18일로 결정되었고, 시위에 사용할 독립선언서와 교유문(敎喩文) 작성, 인쇄, 태극기 제작 등의 역할도 분담되었다. 수차례의 준비 모임은 일본 군경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진주 읍내 여러 곳에서 주도자 2~3명씩 분산해 진행되었고, 거사 준비 점검과 거사 당일 역할 등을 나누었다. 만세시위는 읍내 시장·매립지·법원 지청 앞·공원 등에서 동시에 시작하며, 주도층이 각각 나누어 시위를 이끌고 이후에 읍내 중심부에서 합치도록 계획하였다. 준비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맡겨진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거사 당일에는 읍내 시장 만세시위를 박진환 등과 함께 주도하기로 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오후 1시경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과 태극기를 본뜬 깃발을 세우고, 우선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향해 일제 식민 지배를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동시에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하고 만세시위 참가를 촉구하였다. 연설이 끝난 후, 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선창하였고, 가지고 있던 독립선언서와 교유문을 군중에게 나누어주었다. 만세시위에 호응하여 시장에 모인 군중이 만세를 따라 부르며 순식간에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선두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행진하여 읍내 중심가로 나아갔다. 매립지·법원 지청 앞·공원 등에서 시작된 시위 군중과 합쳐지면서 시위대는 4,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진주 읍내 중심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진주경찰서 경찰들과 진주파견대 군인과 소방대까지 합세하여 폭력적인 강제 진압이 시작되었고, 주도자 체포를 위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도 이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며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일본 군경에 의해 붙잡혔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그 해 6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당하였다. 이에 다시 자신에게 부과된 형량이 과중하다며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6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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