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칠
朴永七1896. 9. 14 ~ 1920.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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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장(2018)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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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2018) 1896년 9월 14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길상면(吉祥面) 길직리(吉稷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며, 부내면(府內面) 강화읍시장(江華邑市場, 관청리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강화군의 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에 거주하는 유봉진(劉鳳鎭)은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강화도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3월 8일 온수리 예수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황도문(黃道文)·염성오(廉成五)·장윤백(張允伯)과 회합하였다. 이들은 각자 분담하여 주민 중에서 동지로 인정할 만한 자들에게 “3월 9일 관청리 교회당에 모이라”는 취지의 내용을 통지하였다. 3월 9일 조종환(趙鍾桓)·염성오·유희철(劉熙哲) 등 십 수 명이 교회당에 모였다. 조종환이 서울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연설하고 “강화도에서만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다”라고 격려하자, 모두 찬동하고 만세시위 계획 수행에 착수하였다. 3월 12~13일경 염성오는 황도문에게서 독립선언서와 『국민회보(國民會報)』 등의 인쇄물을 받아 마을 각 곳에 배부하여 만세시위에 참가하라는 뜻을 전하였다. 유봉진·황유부·황도문은 많은 군중이 모이는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황도문과 황유부는 「강화 군민에게」라는 문서를 배부하여 주민들에게 거사일을 알렸다. 3월 16일 유봉진은 주문도(注文島)에 있는 예수교회당에 모인 신자들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하라고 독려하였다. 이즈음에 만세시위 계획을 알았으며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17일 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유희철·장명순(張明淳) 등은 직산리 장윤백(張允伯)의 집에 모여 “독립시위운동 때에는 각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군중을 지휘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거사 시작 장소인 부내면 관청리시장으로 갔다. 우선 주도자들인 유희철·황일남·황윤실·장명순 등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에 호응하는 군중들과 함께 군청·객사·공자묘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객사를 거쳐 다시 공자묘에 집결한 시위대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여기에서 경찰에 검거된 유희철 등의 석방을 요구하기로 결정하고, 오후 5시경 군중들과 함께 강화경찰서로 이동하는데 선두에 섰다. 경찰서에 도착한 후 순사보 김덕찬(金德贊) 등에게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하지만 순사보들이 이를 따르지 않자, 일부 시위대는 그들을 완력으로 제압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계속해서 만세를 부르다가, 밤 11시경 해산하고 귀가하였다. 경계 강화를 위해 일제는 19일 오전 8시 용산에서 장교 이하 군인 40명을 파견하였고, 시위 참가자 63명을 체포하였다. 만세운동 직후 대대적으로 전개된 일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해 피신하였지만, 결국 1920년에 붙잡혔다. 1920년 5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로 징역 3월을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8월 6일 풀려났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 해 9월 1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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