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혁
朴元赫1893. 11. 11 ~ 1943. 5.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나남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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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3년 11월 11일 함경남도 원산부(元山府) 당중리(堂中里)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회령면(會寧面) 오동(五洞)에 거주하며, 기독교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9년 9월 상순 회령군 예수교회당 앞으로 서울 명제세(明濟世) 명의의 연통제(聯通制) 규칙서 등이 우송되었다. 우송 당일 동료 교사 김인서(金麟瑞)가 연통제 관련 문서를 가지고 찾아왔기에, 연통제의 취지에 공감하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후 김인서에게 연통제 관련 문서 복사본 45장을 받았다. 며칠 후 박관훈(朴寬勳)의 집에서 김인서·박관훈과 함께 비밀리 모여 모두 연통제의 취지에 찬동하고, 함북 지역의 연통제 설치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우선 회령군에 함북의 감독부를 두기로 하고, 감독부의 감독으로는 강준규(姜俊圭)를 추천하고, 박관훈은 재무를 맡고, 이때 서기를 맡기로 하였다. 이어서 회령군 총감부의 총감으로는 진홍진(陳鴻珍)을 추천하고, 부총감은 김인서가 담당키로 하였다. 각 군·면의 기관 설치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다. 이후 동지들의 규합과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진력하였으며, 김인서는 서울로 가서 명제세를 만나 결정사항을 전달하고 임시정부에 보고를 의뢰하였다. 1919년 9월 중순 박관훈의 집으로 경성(鏡城) 출신 노춘섭(盧春燮)을 초대하여, 김인서와 함께 노춘섭에게 연통제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노춘섭이 이에 찬동하자 경성군에도 연통제 조직 설치에 대해 협의하였다. 노춘섭이 상업에 종사하는 이상호(李相鎬)를 적임자로 추천하여, 자필 편지와 함께 연통제 사본 여러 통을 노춘섭에게 줘서 경성군으로 파견하였다. 노춘섭은 이를 이상호에게 전달하여 이후 경성군에 연통제 기관이 설치되었다. 1919년 12월 상순 박관훈의 집에서 이상호·박관훈·전재일(全在一)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함북 대표’ 선발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함북 대의원으로 먼저 윤태선(尹台善)을 파견키로 결정하고, 같은 달 중순 회령의 장원보(張元甫) 집에서 이상호·전재일·김동식(金東湜)과 모여 윤태선과의 교섭은 김동식이 맡기로 하였다. 그러던 차에 같은 달 중순 경성군 주남면(朱南面)의 사감부(司監府) 서기 임정발林(正發)과 박대욱(朴大郁)이 나남경찰서에 체포되면서, 함북 지역의 연통제 조직이 탄로나, 동지 4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는 이를 ‘나남 사건(羅南事件)’으로 불렀다. 재판에 회부되어서도, “조선과 일본의 차이와 일제의 전통 무시” 등을 지적하며,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였다. 1920년 7월 7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예심을 마쳤고, 같은 해 8월 10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 해 1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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