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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순

朴敬淳

1893. 1. 19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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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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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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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한국독립당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95) 1893년 1월 19일 서울 남대문에서 부친 박성현(朴聖鉉)과 모친 김씨의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은 서울 합정(蛤町, 현 서대문구 합동)이다. 호는 예천(禮川)이고, 이명으로 박경순(朴景淳)·복경순(濮敬純, 중국명)이 있다. 7살부터 13살 때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4살부터 17살 때까지 서울 종로 소재 기독교청년회학관(YMCA학관) 야학 영어과에서 배우던 중, 1909년 (음)8월 최지선(崔志善)과 결혼하면서 자퇴하였다. 이후 취직하여 생활하다가, 1914년 4월 중국 안둥현(安東縣)으로 건너갔다. 도착 후 이륭양행(怡隆洋行) 주인 영국인 쇼(George Lewis Shaw)의 소개로 펑톈(奉天)에서 쇼의 동생이 운영하는 이륭양행에 채용되었다. 1년여 후 쇼 동생의 소개로 하얼빈(哈爾濱)에서 러시아인을 상대로 미국 피혁을 파는 미국인과 영국인 공동 경영의 점포로 옮겼다. 그 곳에서 1년여 일하다가 창춘(長春)의 러시아인이 경영하는 운송점으로 옮겼다. 창춘에서 거주 중, 1919년 만세운동 소식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등 독립운동 거점으로 떠오른 상하이(上海)에 관한 소식을 접하였다. 이후 다롄(大連)의 영국인 경영의 운송대리점으로 일자리를 옮겼다가, 1920년 12월 상하이로 갔다. 지인인 윤육(尹堉)의 집에서 기식하던 중, 1921년 3·1운동 기념일을 맞아 서장로(西藏路)에 있는 영파동향회(寧波同鄕會) 건물에서 거행된 독립기념식에 참석하였다. 참석자는 중국인을 합하여 약 1,000명 정도였다. 신규식(申奎植)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 수명과 중국인 유지 등이 기념강연을 하였고, 기념식은 3~4시간 진행된 다음 ‘일본제국 타도’,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산회하였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박찬익(朴贊翊)으로부터 “외무부는 인원이 부족하고 활동도 되지 않으니 참찬(參贊)으로 취직하여 사무에 종사하여 달라”는 제안을 받고, 즉석에서 승낙하고 외무부 참찬 일을 맡게 되었다. 당시 임시정부 청사는 프랑스 조계 백이부로(白爾部路) 신민리(新民里) 입구에 소재하였고, 외무부는 임시정부의 아래층에 있었다. 이후 2개월 정도 일하다가 사직하였다. 그 사이 국무원 비서장 신익희(申翼熙)와 영문 문안을 상의하여, “안공근(安恭根) 외 한 명이 소련에 입국하려 하니 국경 통과를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는 임시정부 명의의 전문을 소련 정부에 타전하였다. 또 당시 상하이에 체류하고 있던 필리핀 총독의 거처로 찾아가 한국독립운동 상황을 소개하는 소책자 3~4종, 일본의 포학한 탄압상을 폭로하는 사진 인쇄물, 임시정부 선전문건 등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8월 프랑스 조계에 있는 미곡상에 취직하여 생계를 꾸렸다. “조선인으로서 임시정부를 위하여 활동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큰일도 하지 않았는데 보수를 받는 것은 미안스러운 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 지급하는 보수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1926년 12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보궐선거에서 민제호(閔濟鎬)와 함께 경기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이 조직되자, 윤기섭(尹琦燮)과 조완구(趙琬九)를 보증인으로 삼아 입당하였다. 처음에는 후보당원으로서 회합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두 달 후 정식당원이 되면서 조완구를 반장으로 하는 반(班)에 편입되었다. 이후 한 달에 1~2회 프랑스 조계 이시영(李始榮)의 집에서 개최된 반회(班會)에 출석하였다. 반회에서는 시사보고와 각자의 견문 사항을 의논하고, 당의 확대 강화 발전책 등을 협의하였다. 매월 회비 20전과 월수입의 1/100을 당비로 납부하였다. 또 한국독립당의 선전기관지인 『한보(韓報)』와 각종 기념일에 발간하는 격문·선전문을 배포하는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매년 맞이하는 3·1운동 기념식에도 틈이 있는 한 참석하였다. 1934년 2월 한국독립당 간부이며 친구인 김사집(金思潗, 본명 김효원(金孝源))으로부터 항저우(杭州)로 피신하라는 통지를 받고 이전하였다. 당시 한국독립당은 항저우시 학사로(學士路) 사금방(思金坊) 41호에 사무실을 두었다. 이때 김사집·이창기·이중환·이상일 부부 등 5명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다. 항저우 도착 즉시 기관지 『진광(震光)』 제2·3호 합간(合刊)의 조판 제작에 참여하여, 동남일보사(東南日報社)에서 인쇄·제작하였다. 약 500부를 상하이·난징(南京)·광둥(廣東)을 비롯한 각지의 한인들에게 우송·배포하였다. 또 한문판(漢文版, 중국어) 약 1,000부를 제작하여 중국 요인과 항일 세력, 학교·도서관 등에 우송·배포하였다. 항저우로 이전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박창세·차리석·문일민 등도 상하이에서 옮겨왔다. 박창세는 다른 곳에 따로 집을 마련하였으며, 문일민과 차리석은 한국독립당 사무소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이들과 함께 한국독립당 본부와는 별도로 ‘항주구(杭州區)’라는 분조(分組)를 조직하였다. 항주구에서는 매월 15일과 월말 두 차례에 걸쳐 구회(區會)를 개최하여 당의 발전과 활동 방침 등을 협의 결정하였다. 항주구회는 일명 ‘특구회(特區會, 항주특별구회(杭州特別區會))’라고도 하였다. 1934년 7월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음을 눈치채고 11월 초순 임시정부 사무소를 항저우시 서대가(西大街) 도항리(濤桓里) 12호로 옮겼다. 이전 직전인 10월 30일부터 11월 3일까지 임시의정원 회의가 개최되었고, 이때 참석하였다. 회의 기간 중에는 중국 사복경관 5명이 회의장 경계를 맡았고, 인근 거리와 임정사무실 입구에는 제복을 입은 경관 2명씩 증원 배치하여 경비를 서 주었다. 1934년 10월 31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유동열과 차리석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하고, 조완구·신공제·문일민 세 의원을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에 선임하였다. 이때 경기도 대표 의원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이전에 맞춰, 1934년 11월 중순 한국독립당 사무소도 항저우시 체육장로(體育場路) 314호로 이전하였다. 당시 사무소에 김사집·양기탁 등과 함께 거주하였다. 그 후 2~3개월 지나 차리석·문일민이 합류하였고, 김두봉·최석순도 때때로 항저우에 오면 이곳에서 숙박하였다. 1935년 2월 15일 열린 한국독립당 제7차 대회에서 양기탁·이창세·김사집과 함께 항주구 대표로 선임되었다. 1935년 7월 창당된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25일 박창세·문일민·김사집 등과 ‘한국독립당 재건 선언’을 발표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하며,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였다. 이후 임시의정원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38년 9월 6일 일본 상하이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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