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필호
閔弼鎬1898. 2. 27 ~ 1963. 4. 14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동제사
- · 박달학원
- · 신아동제사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 · 한국독립당 등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98년 (음)2월 27일 서울 호동(壺洞, 현 종로구 원남동)에서 의정부찬정을 지낸 효헌공(孝獻公) 민치헌(閔致憲)과 이헌경(李憲卿)의 4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자는 중우(仲禹), 호는 석린(石麟)이고 린동판(林東潘)·왕량청(王良誠)등의 중국식 이름도 이명으로 사용하였다. 1909년에 서울 경신(儆新)소학교 5학년 2학기에 입학하여 반년 후 졸업하고 1910년 휘문의숙(徽文義塾, 현 휘문중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을 몇 달 앞둔 1911년 겨울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1913년 박달학원(博達學院)에 들어가 중국어·영어·역사 등을 배웠고, 졸업 후 남양학당(南洋學堂)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그 해 2월에는 동제사(同濟社)에도 가입하였다. 또 중국 국민당(國民黨) 간부와 연합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7월에는 상하이에 있는 교통부 체신학교(遞信學校)에 들어가 전신기술을 배웠고 1918년 12월 졸업 후 중국 교통부 상하이전신국의 전신검사원이 되었다. 1919년 7월 정풍문학원(正風文學院)에 입학하여 중국고문학 등을 공부하고 이듬해 7월 졸업하였다.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같은해 11월 법무총장(法務總長) 신규식(申圭植)의 비서가 되어 임시정부의 외교 업무를 보좌하였다. 1921년 10월 국무총리대리 겸 법무·외무총장 신규식 특사의 수행비서가 되어 10월 26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광둥(廣東)에 도착하였다. 11월 3일 신규식은 중화민국 호법정부(中華民國 護法政府)의 쑨원(孫文) 대총통을 예방하여 국서(國書)를 제출하고 임시정부 승인과 독립운동지원을 약속받았다. 이후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외사국장(外事局長) 박찬익(朴贊翊)을 광둥주재 대표로 상주토록 하였다. 1922년 8월 5일 신규식 사망 후인 1923년 10월부터 1936년 4월까지 13년여 동안 재무총장(財務總長) 이시영(李始榮)의 비서로 임시정부 재정의 실무 책임을 맡았다. 중국 교통부 전보국(電報局)에 근무하면서 임시정부의 경상비 조달 등 임시정부 재정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기도 하였다. 1924년 1월 12일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 의사회(上海大韓人居留民團議事會)에서 학무위원(學務委員)에 선출되어 인성학교(仁成學校) 운영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4월 5일 결성된 상하이청년동맹회에도 참여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항저우(杭州)로 옮기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각지로 피신한 후에도 임시정부와 김구의 서신 및 항일운동단체와의 통신 임무를 수행하였다. 상하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면서 항저우 전보국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이름을 린동판(林東潘)으로 바꾸고 난징(南京) 교통부 직원으로 다시 옮겼다. 1934년 2월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 있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자, 한인특별반 운영을 위하여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간의 연락원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에는 중국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 시종실(侍從室)의 직속기관인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대령급)로 근무하다가,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장(소장급)으로 옮겨 근무하였다. 중국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의 공세에 밀려 난징을 떠나자 장제스의 시종실을 따라 쿤밍(昆明)을 거쳐 1938년 임시수도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1939년 5월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장을 사임하고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군사위원회에서 담당했던 주요업무는 일본의 외교, 군사 암호전보 등을 해독하는 일이었다. 1940년 5월 9일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재건파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출범할 때,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이후 1944년 8월 임정 김구주석의 판공실장(辦公室長) 겸 외무차장(外務次長)에 임명될 때까지 중앙상무감찰위원 및 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42년 10월 28일 김구·조성환(曺成煥)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미령(美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10월에는 경기도 의원에 선출되어,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취소 교섭안, 외교를 영국·미국·소련 등으로 확대하자는 등의 안건 제의에 동참하는 등 한국광복군의 자주성 회복과 외교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2월 8일 국무위원회 주석판공실(主席辦公室) 비서에, 6월 1일 외무차장에 임명되었다. 6월 22일에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의 개정을 위한 제1차 회의에 참석하여 중국군사위원회로부터 ‘개정을 보증(保證)한다’는 대답을 이끌어 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7월 4일에는 주석판공실 주임(主任)으로 승진하였고, 1945년 5월에는 프랑스 해방을 축하하는 김구 주석의 메시지를 프랑스대사관에 전달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중국 국민당정부와 교섭하여 임시정부 요인의 귀국을 돕는 한편,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 대표에 임명되었다. 1945년 11월 5일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국을 위해 상하이로 떠난 이래 이듬해 7월까지 중국 측과 교섭하여 충칭에 남아있는 임시정부 직원과 가족, 학병, 중국 국적을 가진 광복군 직원 등 100여 명을 무사히 귀국시키는 일에 집중하였다. 1946년 시작된 국공내전의 전황이 위태로워지자 1948년 10월 주화대표단원과 잔여 교민을 타이완(臺灣)으로 이동시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9년 8월 타이완 주재 대한민국 초대 총영사(總領事)에 임명되었다. 1951년 7월 신병으로 총영사직을 사직하였고, 1957년 7월 귀국하였다. 저서로 『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史話)』, 『한국사지총서(韓國史地叢書)』 등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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