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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호

朴永鎬

1899. 1. 1 ~ 1994.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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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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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水原)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수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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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9년 1월 1일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현 화성시)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춘흥(朴春興)을 사용하였다. 1919년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송산면에서는 홍면옥(洪冕玉), 홍효선(洪孝善) 등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26일 호세(戶稅)를 납부하기 위해 구장인 홍명선(洪明善)의 집에 모인 주민 약 120여 명과 함께 송산면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오후 5시경 사강리에 위치한 송산면 면사무소 부근에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첫 번째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참여한 사람은 주민 150여 명이었다. 이틀 후인 3월 28일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참여하였다. 이 날은 마침 사강리 시장의 장날로, 마을 사람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일본 경찰은 또다시 만세시위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시장의 가게 문을 닫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오전 10시경 사강리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만세시위 참여자는 더욱 늘어나 오후 2~3시경 군중은 1,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군중들과 함께 송산면 면사무소 뒤 언덕에 모여 태극기를 내걸고 조선독립만세를 큰 소리로 외쳤다. 만세운동이 확대되자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순사부장을 필두로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주도자인 홍면옥, 이규선(李奎善), 예종구(芮鍾九) 등을 꿇어앉히고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홍면옥이 저항하며 일어나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노구치 순사가 홍면옥에게 총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혔다. 이에 격분하여 주민들과 함께 격렬하게 항의하였고, 만세시위가 고조되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순사가 자전거를 타고 남양(南陽) 방면으로 도주하려고 하자, 주민들과 함께 돌을 던지면서 추격하였다. 결국 순사는 도로변에 쓰러졌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였다. 이 일로 3월 29일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오랫동안 고초를 겪고 재판에 넘겨졌다.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보안법 위반, 살인, 치안방해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고, 1920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치안방해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형량은 동일하게 징역 7년(미결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 산입)을 다시 받았다. 재차 불복하고 상고하였으나,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영진(한역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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