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환
朴壽煥1886. 3. 7 ~ 1950. 1. 4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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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1886년 3월 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리(遠黃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농업에 종사하면서 영덕군 영해면(寧海面)과 병곡면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영덕군의 만세운동은 지품면(知品面) 북장로교 교회의 조사(助事)인 김세영(金世榮)을 중심으로 논의되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직접 경험하고 돌아온 김세영은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과 만나 전국적인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병천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교회의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협의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김세영은 김혁동(金赫東)을 영덕의 강우근(姜佑根)·김우일(金愚一)과 만나도록 하고, 지품면의 김태을(金太乙)과 황장동(黃膓洞)의 주명우(朱明宇) 등에게 김중명(金重命)을 보내 만세시위를 논의하게 하였다. 권태원에 의하여 만세운동의 전국적 상황과 김세영의 계획을 전해 들은 정규하는 성내동(城內洞)시장의 장날인 3월 18일에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인들과 접촉하였다. 권태원은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 등과 함께 양반 가문과 협의해 동참하기로 하였다. 3월 18일 정오경 정규하·남효직 등은 태극기를 준비하고 시장으로 이동하였다. 오후 1시 ‘대한독립만세’가 울려 퍼지자, 2,000~3,000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일제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시위대는 영해경찰관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우편소·심상소학교·면사무소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영덕경찰서장과 경찰 몇 명이 시위 해산을 명하기 위해 진입하였지만, 오히려 시위대에게 쫓겨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 구타당하고 감금되기도 하였다. 이때 시위 군중을 이끌면서 주재소의 집기와 서류 등의 훼손을 주도하였고, 면사무소와 우편소 등의 기관을 공격할 때도 앞장섰다. 영해면의 만세시위는 오후 2시경 정규하의 주도로 병곡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확대되었는데 이때 병곡면으로 함께 행진하였다. 병곡경찰관주재소와 병곡면사무소 앞에서 400~5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을 파괴하고 장부와 집기들을 훼손하는데 앞장섰다. 울진군(蔚珍郡) 평해(平海)헌병분견소 헌병들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자 시위대가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40여 명이 현장에서 붙잡혔다.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음으로 체포망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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