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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찬

朴文燦

1877. 7. 16 ~ 196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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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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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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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2) 1877년 7월 16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원황리(遠黃里)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기독교였고, 1911년 설립된 삼사(三思)교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면서, 영해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초를 겪었다. 3월 18일 영해면 성내동(城內洞)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은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인 김세영(金世榮)이 주도하였다. 김세영은 서울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평소에 친분이 두터운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에게 영덕지역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하였다. 김세영과 권태원은 만세운동을 거행하기 위해 지역의 기독교 신자들과 연락을 취하였다. 권태원은 병천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교회의 조사 정규하(丁奎河)와 연락을 취해 3월 18일 성내동시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기독교인과 양반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때 소식을 접하고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하였다. 거사일인 3월 18일, 성내동시장으로 갔다. 정오경 정규하·남효직(南孝直) 등 시위 주도자들이 미리 준비한 대형·중형·소형의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를 쓴 깃발을 안고 성내동시장에 진입하였다. 오후 1시 2,000~3,000명 규모의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해산을 종용하였지만,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퇴각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영해경찰관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우편소·심상소학교·면사무소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는 건물을 파괴하고 경찰을 구타하는 등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영덕경찰서장과 경찰 몇 명이 시위 해산을 명하기 위해 진입하였지만, 오히려 시위대에게 쫓겨 도망을 치다가 붙잡혀 구타당하고 감금되었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포항과 대구 방면에서 일본군을 투입하여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일제 군경의 무자비한 진압 과정에서 8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검거된 사람 가운데 재판에 넘겨진 사람만 90여 명에 달하였다. 이때 주재소 습격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혔고,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와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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