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이
朴同伊1874. 9. 19 ~ 1941. 4.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영덕군 창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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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74년 9월 19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창수동(蒼水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영원(朴永源)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당시 농업에 종사하면서 창수면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영덕군의 만세운동은 3월 중순 계획이 이루어졌고, 3월 18일 영덕과 영해(寧海)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4월 4일까지 지속되었다. 수천 명에서 수십 명 규모의 크고 작은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영해면 병곡면(柄谷面)과 적극 참가한 창수면(蒼水面)의 만세시위는 경찰서·주재소·학교 등 일제 공공시설을 파괴하는 등 다소 과격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기독교계였다. 특히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인 김세영(金世榮)이 중심에 있었다. 김세영은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가던 중 서울에서 전개되었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영덕에 만세운동을 알리고 동참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유학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귀향한 후 평소에 친분이 있던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을 만나 파리강화화의와 민족자결주의에 대하여 설명하고, 한국도 2명의 대표를 파견하였다는 내용을 전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하여 현재 조선 각지에서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서울·평양·대구 등 다른 지역의 기독교·천도교 세력은 물론, 각 학교 학생들도 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으니 영덕에서도 기독교인과 다른 사람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거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의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 정규하(丁奎河)에게 연락을 취하고, 지역의 양반 가문에도 협력을 요청하였다. 정규하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영해의 성내동(城內洞) 시장 장날인 3월 18일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창수면의 만세시위는 3월 18일~19일 영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3월 19일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영해로 향하였지만, 시위에 동참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창수에서 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주변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만세꾼이 내려왔으니 시위에 참가하라”, “창수로 가서 만세를 부르자”, “창수주재소를 습격할테니 같이 가자”, “한국이 독립을 한다는데 어찌 만세를 부르지 않느냐”라며 만세운동 참여를 독려하였다. 신기동(新基洞)에서는 구장 이현설(李鉉卨)과 협의하며 일본에 토지를 빼앗긴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때 김용건(金容虔)의 권유를 받고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10여 명으로 시작한 시위대의 규모는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이르러 400명 가량으로 늘어났다.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큰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외쳤다. 이후 만세시위는 창수주재소에 들어가서 기물을 파손하는 등 다소 격렬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창수경찰주재소의 서류를 파손하고 주재소 안 숙소의 목욕탕을 파괴하는 행동에 앞장섰다. 그러자 경찰들은 재빨리 몸을 피하였다. 시위대의 행동으로 사무실과 숙소, 객실 각 1동으로 구성된 주재소의 미닫이 문과 벽이 전부 파괴되었고, 문서와 집기, 순사들의 개인물품까지 훼손되었으며 마당의 나무들도 모두 잘려 나갔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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