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모
文昌模1907. 4. 23 ~ 2002. 3.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5)
관련 사건
- · 6.10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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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1995) 1907년 4월 23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남면(南面) 삼성리(三省里)에서 문승훈(文勝勳)과 전(田) 씨의 3남 3녀 중 맏이로 출생하였다. 6·10만세운동에 이은 학생운동을 계획하던 중 고초를 겪었다. 1919년 상봉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 이하 배재고보)에 다시 입학하여 하기순회강연단 및 기독교청년회 종교부의 하기 순회전도대의 일원으로 강연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4학년을 마치고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였지만, 검정시험 문제로 1926년 1학기 때 배재고보 5학년으로 편입하였다. 선천 출신 학생들의 모임인 선천유학생회에서 집행위원·총무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만세운동에 힘입어 배재고보와 피어슨성경학원(皮漁善聖經學院),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 학생들과 1919년 만세운동, 6·10만세운동에 이은 ‘제3의 학생운동’을 계획하였다. 격문을 인쇄하여 피어슨성경학원 기숙사에 두었다가 밀고로 발각되었다. 6월 16일 유재헌(劉載獻) 외 학생 2명이 기숙사에서 체포되었고, 6월 18일 새벽 나머지 학생들과 함께 붙잡혔다. 1926년 6월 25일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지만 6월 30일 오후 다른 학생들과 함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7월 1일에는 배재고보로부터 무기정학을 받았다. 이후 학교로 복귀하여 1927년 졸업 시에는 졸업생 대표로 10년 이상 근속한 다섯 교사를 위한 기념식을 주재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1927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醫學專門學校, 이하 세브란스의전)에 입학한 후에는 전문학교 축구연맹전 본부위원으로 활동하며 세브란스의전 내 야구·축구·육상·농구·배구·유도·수영 등 운동부 대표를 맡기도 하였다. 1929년에는 고향인 선천의 사립 영성(永成)학교 제7회 창립기념식 사회를 맡는 등 고향의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31년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당직의로 근무하던 중 병원장과의 마찰로 47명 당직의 전원 총파업을 주도하여 해고당하였다. 이후 해주 구세병원 의사로 일하며 폐결핵 환자,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진료소 증축에 힘썼다. 1932년 조선폐병박멸운동회 활동 일환으로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보급하였다. 1934년 평양기독병원 이비인후과에서 근무하다가 1935년 황해도 옹진군(甕津郡)의 공의(公醫)로 임명되어 용호도(龍湖島)에 삼오의원(三五醫院)을 개업하였다. 또 교회를 지어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고, 극빈자들을 무료로 진료하였다. 1940년 11월 해주 구세병원 셔우드 홀 원장의 후임 경영자로 선정되어 병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1938년 감리교총회 대의원일 때는 감리교의 친일화를 저지하기 위해 힘썼다. 1941년 2월 3일 정춘수(鄭春洙) 감독 등이 감리교의 친일화를 획책하고 일본기독교 조선혁신단을 창립하려 하자, 1943년까지 이규갑(李奎甲)·조신일(趙信一) 등과 저지 투쟁을 벌였다. 1945년 8월 17일 해주지역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9월 16일 소련군에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38선을 넘었다. 1946년 이후 인천도립병원장, 국립마산결핵요양소장, 세브란스병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인천기독병원을 설립하고 1953년 대한결핵협회 창립을 주도하였으며, 1964년 원주에서 문이비인후과를 개원해 2001년까지 진료하였다. 의료계에 기여한 공로로 1985년 국민훈장 모란장, 2002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한편, 1992년에는 14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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