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학
文昌學1882 ~ 1923. 12.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임시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결사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8)
관련 사건
- · 신건원주재소 습격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8)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 미포면(美浦面) 미산리(美山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2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문언준(文彦俊)이라는 이명이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고 대한국민의회 의장을 지낸 문창범(文昌範)이 사촌형이다. 어렸을 때 집안은 여관을 하던 집을 구입할 만큼 부유하였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는 헌병보조원을 하였다. 선배인 김학섭(金學燮)이 조직한 임시대한독립군(臨時大韓獨立軍)[대한독립군결사대(大韓獨立軍決死隊)]에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임시대한독립군은 1920년 12월 시베리아에서 결성되었다. 1920년 9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다가 러시아로 들어간 김학섭·강병관(姜秉官)·강석훈(姜錫勳) 등은 청산리전투 이후 군사행동을 대규모하는 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직접 국내로 잠입해 일제의 기관 폭파나 주구 등을 직접 처단하는 것이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2월 초 강용관(姜龍官)의 집에서 단체를 조직하였고, 그를 포함하여 김병관·강석훈·최시능(崔時能)·최영찬(崔英燦)·강용관 등 15인이 대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워싱턴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것도 논의하였으나, 국내에서의 실질적인 투쟁을 수행하기로 하고 함경북도에 위치한 웅기항(雄基港)을 1차 목표로 설정하였다. 웅기항 공격을 위해 무기 구입을 마치고, 1921년 11월 26일 1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각자 소총 1정, 실탄 150~200발, 수류탄 1~2개, 7인에 권정 1정 등을 휴대하고 우수리강(烏蘇里江)을 넘어갔다. 1922년 1월 2일 중국 훈춘현(琿春縣) 홍룡구(紅龍溝)에 도착하였으나 일본 군경의 국경 경비가 삼엄하여 웅기항 공격 계획을 포기하고, 대신 목표를 웅기군에 위치한 신건원경찰관주재소로 변경하였다. 이들은 1922년 1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병력을 3대로 나누어, 김학섭이 제1대장, 김병관이 제2대장, 강석훈이 제3대장을 맡기로 하였다. 그리고 제1·2대는 신건원의 입구 고지에서 신건수비대(新乾守備隊)의 출동을 막고, 제3대는 직접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때 신건원주재소에서 헌병보조원을 한 경험을 토대로 동료들에게 주재소 건물의 위치와 순사 배치 등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강석훈과 함께 4명을 이끌고 선봉대로 1월 5일 새벽 제일 먼저 신건원주재소에 도착하였다. 김학섭은 강병관과 각각 3명을 인솔해 신건수비대를 습격하기로 하고, 4일 밤 두만강을 건너 신건동에 도착하였다. 오전 1시 불빛을 신호로 주재소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교전 40분 만에 일본 순사 마츠키(松岐安太郞)를 사살하고 주재소 건물도 파괴하였으며, 제1·2대가 수비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모두 두만강을 건너 피신하였다. 이후 훈춘에서 무장항일투쟁을 지속하다가 1922년 12월 중순 밀정의 밀고로 훈춘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청진으로 끌려왔다. 1923년 5월 25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사형을 받고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1923년 11월 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1923년 12월 20일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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