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건
朴世健1888. 7. 6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민회
- · 대한광복군총영
- · 신간회 선천지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신민회
- · 대한광복군총영
- · 신간회 선천지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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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63) 1888년 7월 6일 평안북도 선천군(宣川郡) 신부면(新府面) 원동(院洞)에서 박승호(朴承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명은 박세건(朴世鍵)이고, 원동교회 목사인 부친을 따라 기독교인이 되었다. 선천군의 명신(明信)학교와 신성(信聖)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혀 조사를 받았다. 신성중학교 재학 당시인 1910년 12월 27일 선천역을 방문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총독을 다른 신성중학교 학생들과 함께 단총으로 암살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 신민회를 탄압하려던 일제가 무리하게 조작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19년 3월 1일 선천군 선천면 만세운동에 아버지 박승호와 함께 참여하였다. 선천면 만세시위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한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 목사인 양전백(梁甸伯)의 영향으로 준비되었다. 준비 실무는 모교인 신성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담당하였다. 3월 1일 12시 신성학교 강당에 교사와 학생들이 모여 조선 독립에 대한 연설회를 가지고 선천 읍내로 행진을 하며 시작되었다. 500~600명으로 시작한 만세시위 인원은 가두행진을 하면서 2,000명까지 늘어났다. 이에 참가하여 선천군청, 선천경찰서 등 관청으로 행진하였다. 일제 경찰과 선천 철도원호대(鐵道援護隊) 군인들은 만세운동 참가자들 가운데 현장에서 20~30명을 체포하였고, 밤늦게까지 검거 작전을 지속하여 75명을 붙잡았다. 『동아일보』 1922년 8월 8일자 기사에는 이 만세운동으로 아버지 박승호와 함께 붙잡혀 각각 1년을 받았다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박승호는 1919년 7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6월이 확정된 판결문이 존재하지만, 관련 자료가 없어 정확한 옥고 기간과 형량을 확인할 수 없다. 1920년 9월 서울에서 개최한 기독교청년회에 선천청년회 대표자로 참석하였는데, 이때 선천경찰서 투탄 의거(박치의 의거) 가담을 이유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 9월 1일 오전 3시에 박치의(朴治毅)는 대한광복군총영으로부터 제공받은 폭탄을 선천경찰서에 투척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 등 여러 종류의 격문을 뿌렸다. 일제 측의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미국의원단 일행이 한국을 방문한 시점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려는 운동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의거였다. 이에 참여하여 계획과정에 가담하였고 폭탄을 보관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일로 1920년 12월 20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과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고 항소하였지만,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2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26년 6월 25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한편 아버지 박승호도 같은 사건으로 붙잡혀 징역 5년을 받았는데, 옥고를 치르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22년 8월 4일 옥외 치료를 위해 출옥하였다가 당일에 결국 사망하였다. 출옥 이후 선천 지역에서 기독교청년회와 신간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선천 기독교청년회에서는 종교부장·서기·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5월 30일 신간회 선천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신간회 선천지회는 설립 초기에 서무부·재정부·정치문화부·조사연구부·선전부 5부로 구성되었는데, 조사연구부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30년까지 신간회 선천지회에서 부회장·상무집행위원·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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