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팔
朴敬八미상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이강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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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강원도 원주군(原州郡) 출신이다. 충청북도 영춘군(永春郡) 군내면(郡內面) 용소동(龍沼洞, 현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출신이라는 기록도 있다. 자료의 한계로 출생일자는 확인할 수 없다. 1907년 말 이강년(李康秊) 의병부대가 가평(加平) 화악산(華嶽山) 부근으로 이동할 때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활동하였다. 이강년은 을미의병기 문경(聞慶)에서 의병을 일으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이에 분개하여 제천(堤川)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각지에 격고문을 보내 의병을 모으자 여러 의병부대가 이강년 부대에 합류하였다. 1907년 12월 15일 이강년 의병부대의 방수장(防守將)으로 임명되었다. 의병부대가 가평 일대에 주둔하면서 일본군의 동태를 탐지할 때 가평군 북면(北面) 도대리(道大里)에서 보낸 보고에서 일본군이 옆 마을인 백둔리(栢屯里)에 들어와 포수 7명을 생포해 갔다고 하였는데, 방수장으로서 이에 대해 “어제 백둔리에서 잡혔던 포수 7명을 적이 모두 물건을 받고 놓아 주었으니 필시 토왜(土倭)일 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 이후 용소동에 머무를 때 가평군 북면 논남기(論男基)에 20여 명의 일본군이 침입한 일이 있었는데, 그들은 귀목령을 넘어 영평(永平)에 주둔하던 일본군과 합류하여 대략 80여 명이 되어 행낭리(行廊里)에 며칠 머무르다 돌아갔다. 그런데 진동(鎭東) 참모(參謀) 김연성(金演性)과 안동장(安東將) 김용익(金龍翊)이 이들 일본군에게 쫓겨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 그가 있던 용소동에 와서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일을 바로 이강년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이강년이 서로 연락이 가능한 곳에 머무르며 이들을 지원하라고 하자, 명령을 따르고 이들과 합세하였다. 1908년 1월 8일 화악산 일대 곡운 지역에서 진동대장(鎭東隊長) 황순일(黃淳一)이 휘하에 두던 포군 7명을 보내 민가를 약탈하게 하고, 중군 이세창(李世昌)이 노략질을 자행하여 곡운 민심이 소란스러워지자 이강년으로부터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지시받았다. 그 지역 담당자로서 황순일·이세창 등이 빼앗은 물건들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찾아내고, 각 동에 명령을 내려 물건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이를 골고루 나누어 갖게 하였다. 1908년 2월 16일 관청리(官廳里)에 잠입하여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파수병에게 일본군 침입 사실을 전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청리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일본군의 인질로 붙잡혔다. 다음 날인 2월 17일 관청리 부근에서 이강년 의병장이 부대를 이끌고 왔을 때, 이강년에게 공격 신호를 보내어 일본군을 격파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교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안전한 곳으로 마을 사람들을 피신시켜 보호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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