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우
朴可又188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최산흥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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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5) 전라북도 임실군(任實郡) 덕치면(德峙面) 암치(岩峙, 현 장암리)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88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부터 전북 순창(淳昌) 출신의 의병장 최산흥(崔山興)의 휘하로 들어가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에 참가하였다. 부대장인 최산흥은 1906년 최익현(崔益鉉)을 맹주로 한 태인의병이 봉기한 직후부터 의병에 참가한 후 많은 전투 경험을 쌓았다. 특히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전북 임실과 남원(南原)·진안(鎭安)·용담(龍潭) 등지에서 양윤숙(楊允淑) 의병부대에 소속되어 일본군과 지속적인 전투를 벌여 나갔다. 최산흥은 이때부터 양윤숙 의병부대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양윤숙 의병부대는 이때 전북 지역의 일본군 수비헌병대와 순사주재소 등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는데 최산흥의 역할이 컸다. 이 무렵 양윤숙 의병부대는 약 500~600명 이상의 군세를 자랑하는 대규모 부대였는데 순창과 임실을 근거지로 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한편, 1907년부터 1910년 사이 의병들은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키면서 부대 간 연합을 통해 대규모 의병부대를 형성한 후 활발한 반일투쟁을 벌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제가 군경을 동원해 대대적인 탄압 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의병부대는 이에 크게 타격을 받아 대규모 의병부대의 활동은 점점 위축되었고 소규모 부대로 쪼개져 험한 산지를 근거지로 삼는 유격전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양윤숙 의병부대의 중군장이었던 최산흥도 50여 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전북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게 되었고, 이 무렵에 이 부대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11월경부터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5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소규모 부대로 활동하게 된 최산흥 의병부대는 유격전을 지속하기 위해 무장한 채로 순창의 구암면(龜岩面) 일대와 임실의 아산면(阿山面) 일대를 근거지로 삼았다. 이후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 밀고자 및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효과적인 군자금 모금을 위해 근거지 부근의 순창과 임실, 태인 등지에서 각 마을의 이장(里長)에게 군자금을 할당한 후 징수하는 형식으로 모금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망이 점차 좁혀오면서 최산흥 의병부대는 위기에 처하였다. 부대원은 친일파 처단 활동과 군자금 모금 과정 중에 일본군에 그 활동이 포착되어 붙잡혔다. 이로 인해 의병부대의 부대원은 50여 명에서 10여 명으로 감소할 정도였다. 이처럼 쫓기던 와중에 1909년 3월 11일부터 18일까지 15명의 부대원들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순창군 일대를 돌아다니며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중에 붙잡혔다. 이후 1910년 1월 19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에서 이른바 폭동죄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약 7개월의 옥고를 치른 뒤 1910년 8월 소위 대사령(大赦令)에 의해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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