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치도
閔致道1868. 6. 3 ~ 1921. 8.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심남일의병
- · 조선민족대동단
- · 국민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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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0) 1868년 6월 3일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이양면(梨陽面) 품평리(品坪里)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전라남도 광산군(光山郡) 임곡면(林谷面) 두동리(杜洞里)이다.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당시에 ‘야소교 조사(耶蘇敎 助事)’로 언급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기독교계에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남 의병은 기삼연(奇參衍) 부대, 심남일(沈南一) 부대, 안규홍(安圭洪) 부대가, 전북은 김동신(金東臣)·문태수(文泰洙)·이석용(李錫庸) 부대가 대표적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의병투쟁에 대해 전력의 정비를 방해하고 대한제국의 식민지화를 저지할 뿐 아니라, 제국 군대로서의 위신에 손상이 가해진다며 각 지역 의병활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에는 1906년 3월부터 1911년 6월까지 의병부대 피해로 사망 1만 7,779명, 부상 376명, 포로 2,139명이 발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 중에서 심남일 의병부대는 전남 강진군(康津郡)과 장흥군(長興郡) 일대의 도서 지역을 중심으로 대일 무장활동을 전개하였고, 전남에서 활동하였던 11개 의병부대가 연합하였던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에도 가담하였다. 엄정한 군기를 확립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유의하는 등 규율과 체계를 갖추었던 의병부대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벌이던 심남일 의병부대에 친척과 자제들을 통하여 군자금 백여 냥을 지원하였다. 1910년대 말엽 정재면(鄭載冕)·주창업(朱昌業) 등과 함께 국민당 및 결사대 조직에 나섰다. 1920년 9월 21일과 10월 29일에는 전남 화순군수를 비롯하여 능주군(綾州郡)·영광군(靈光郡)의 각 면장에게 ‘왜노(倭奴)의 충신(忠臣)’은 왜노와 함께 처단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사직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광주에서 국민당과 결사대 조직을 위하여 당시 호남의 부호였던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양회진(梁會津)·윤자삼(尹滋三)·민영동(閔泳東)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정인채와 양회진에게 각각 80원과 12원을 지원받았다. 이후 숭일학교(崇一學校) 선생이었던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단원 김정련(金正連)과 협의하여 군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고자 하였다. 또한 김정련 및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 등 조선민족대동단 단원들과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활동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김가진(金嘉鎭)·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주축이 되어 계급과 종교를 초월하여 결성한 조직으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安昌浩)와 사전 협의를 통해 1920년 3월 6일에 김가진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격고문(大同團檄告文)」을 발표하고 대동단 총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하였다. 이 군자금 모집 등 활동이 화순경찰서에 발각되어, 1920년 10월 31일 화순군 외남면(外南面) 검산리(檢山里)에서 붙잡혔다. 하지만 당시 59세의 노년으로 조사 받던 도중 병세가 악화되어 1921년 1월에는 보석을 받아 잠시 풀려났다. 1921년 5월 12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원심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21년 7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과 같이 징역 5년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징역형을 받은 직후 신병으로 인하여 보석되었다가 그 이튿날 “내가 죽은 후 대한 자손들아 국권을 회복하라”라는 내용으로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였다 한다. 한편, 『매일신보』 기사에 의하면,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된 이후인 1921년 8월 9일 화순경찰서에서 다시 체포하기 위하여 가택에 방문하였으나, 8월 10일 인근 야산에서 자결한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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